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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Feb 14. 2021

아픈 엄마 곁에 아픈 아이

아기엄마의 투병일기

"애가 눈치를 너무 많이 보더라. 짠한 것이."


항암을 마친 지 1년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검사로 본 스캔과 ct 촬영이 잡혀있었는데, 하필 점심시간 직후에 시작해 밤 9시 반에나 끝나는 일정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남편이 오후 반차를 쓰기로 했었는데, 달력을 다시 보니 하필 검사 날이 구정 연휴 하루 전 날이었다. 반차를 쓰지 않아도 적당히 일찍 끝나는 그런 날 말이다.
그래서 아이의 하원을 친정엄마께 부탁드렸다.
엄마가 하원을 해서 우리 집에 계시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이 엄마와 교대를 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귀가시간이 늦어버렸다.
그날따라 서울시내 지하철에서 장애인 보행권 보장에 관한 시위가 있었다나 뭐라나. 지하철 한 구간을 지나가는데 30분이 넘게 걸리고,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탔더니 다시 회사 앞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바람에 엄마는 여섯 시간 가까이 아이와 단둘이 계셨다.
척추협착증이 심각하고, 툭하면 갈비뼈가 부러지며, 당뇨합병증으로 걷는 것도 불안불안한 일흔 넘은 할머니와 일곱 살 어린이가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원래 명절 연휴에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호텔에 갔었다. 형제도 없고, 아빠 안 계신 집에 엄마랑 둘이 덩그러니 앉아 명절날 아침을 맞이하는 게 싫었던 연유였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며 불안감을 느낀 엄마가 명절 호캉스를 거부하셨다. 공조기로 도는 시스템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아마 지난 명절에 가셨던 호캉스 끝에 독감을 앓으셨던 게 아직도 불안하신 듯하다.
남편과 아이를 시가에 보내고 엄마와 둘이 누워 무한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의 외손녀인 걸 생각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어때?"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고 똑똑하다고 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내 기대를 비껴갔다. 애가 애 답지 않게 눈치를 많이 보고, 애어른이 다 되어버려서 짠하고 안타깝다는 게 대답이었다.

외할머니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아이는 내내 뒤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줬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할머니는 손님이니 앉아계시라며, 우유를 꺼내 따라 대접을 했다나 뭐라나.
남편이 일찍 퇴근해 올 계획이어서 따로 밥을 해놓지 않고 갔던지라, 아이의 밥때를 놓치고 먹일게 마땅치 않았는데도 아빠 엄마가 집에 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라며 버티더라는 이야기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평소에는 아빠가 안 계실 틈에 아빠가 사다 놓은 라면을 어떻게든 몰래 먹고 싶어서 난리인 아이인데 말이다.
할머니랑 라면을 끓여 먹자는 제안에도 그건 아빠 거라서 절대 건들면 안 된다고 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하긴 그런 아이였다.
내 아드리아마이신 2차 항암을 앞두고 아이가 아팠다. 전염성 질환이 의심되는지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아이를 데리고 항암주사 맞으러 병원에 같이 갈 수도 없었다. 친정아버지는 당시 병원에서 생사를 오가고 계셨던지라 도움받을 곳도 없었다. 급하게 지역 건강가정지원센터에 연락을 하고, 정말 급하게 카드와 서류를 만들고, 시간제 보육 선생님을 구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지어놓고, 된장국도 한 솥 끓여놓고, 아이 먹일 약에 대한 설명을 시간표대로 적어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반나절 가까이 있어야 할 아이가 걱정이었지만, 그분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잘 아는 권사님께 연락을 드려 혹여 낮 시간에라도 잠깐 가서 아이가 잘 있는지 봐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까지 드렸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마지막 날 오후 산책길에 시간제 보육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이가 눈치를 많이 보고 베란다에서 자꾸 귤을 꺼내다 주며 손님을 챙기려 들더라는 것들이었다. 아마 아이가 만 37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끌어안고 지난 일들을 살살 물어보니 술술 대답을 한다.
할머니는 손님이니까.
엄마 아빠가 안 오면 못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서.
아빠 엄마가 화를 내면 나를 잡아먹을까 봐 겁이 나서.
엄마를 힘들게 하면 엄마가 죽어 없어질까 봐.
...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에겐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결국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게 내게는 최선이었다.
아이가 너무 일찍 철이 들고 눈치를 본다는 걸 알아서 최대한 보육환경에 변화를 주지 않고 키우려고 노력을 했었다. 이마저도 외벌이 외동 가정이라 가점이 낮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으로 갔다가 그곳이 폐원을 하는 바람에 시립어린이집으로 옮기는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이제야 몸도 추스르고, 내 몸 챙길 여유도 생기고, 내 이름으로 일도 시작하는데, 비바람 부는 사각지대에서 부족한 엄마의 손을 잡고 같이 서 있었던 아이는 여전히 아픈 것 같다.
그래도 살아남아 아이 곁에 있어 다행인 걸까.


한동안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사람들이 4기병 작가님을 응원했었다. 뒤늦게 그분의 피드를 보다가 눈길이 멈춘 지점이, 생각보다 젊은 엄마들이 많이 아프다는 인터뷰 대목이었다.

생각보다 젊은 엄마들이 많이 아프고 많이들 세상을 떠난다고, 그게 너무나 안타깝다고.
나 역시 그런, 아픈 젊은 엄마였다.




한 쪽 팔에 수도 없이 주사를 찔리고, 넣을 때마다 기분 나쁜 검사 약물을 투입당하면서 생각했다.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언제까지 하긴.
죽기 전까지 하겠지.
이렇게라도 해서 오래 살아 가족 곁에 있어야지.
늦은 밤, 병원 로비에 앉아 픽업 온다는 남편을 기다리다 든 결론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어린이집 앞에 있는 단골 카페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기는 딱 연구자 같은 스타일 같아. 평생 공부하는 사람."
암에 걸리기 전부터 나를 알던 사장님의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사장님. 혹시 여기 손님들 중에 젊은 암 환자 있으면 저 소개 좀 시켜주세요."
내 말에 사장님의 얼굴이 급격히 슬퍼졌다.
동네에 한 명이 있었다고 했다.
딸아이 하나,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였는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


그 동네에 있는 영아전담 어린이집에 우리 아이를 보냈었다.
수술 당일, 수술 스케줄이 계속 뒤로 밀려 아이 하원 일정이 미뤄져 불안해하던 그때, 밤늦게까지라도 선생님이 남아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수술 잘 받으라 해주셨던 원장님이 계신 곳이었다. 항암을 시작하며 아이를 재난적 지원 신청으로 종일반으로 바꾼 나에게 원장님이 그 절차를 물어보셨던 적이 있다. 어떻게 전환이 가능했냐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같은 어린이집에 엄마가 위암 말기인 가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집은 그런 걸 신청할 줄 모르는지 꼬박꼬박 시간 맞춰 데리고 가며 고생을 한다고, 그걸 그 집에도 알려주셔야겠다고 말이다.
그 동네에 사는 젊은 엄마, 그 동네가 친정인 그 젊은 엄마.
카페 사장님을 통해 들은 그 엄마의 부고 소식에 뭐라 형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픈 엄마 곁에서 같이 마음을 다쳐버린 어린아이가 계속 눈에 들어오는 나날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린 대로 크면 크는 대로, 하나뿐인 딸아이는 내게 아픈 열 손가락이다.
나는 이제 좀 추스르고 살만한데, 저 아이는 언제쯤 살만한 시기가 올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부족해서 미안하다.
그게 우리에게는 최선이었는데.
아픈엄마 곁에 마음이 아픈 아이.

곁을 떠난 아픈엄마와 세상에 남은 마음이 다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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