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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Dec 04. 2020

평생을 암환자로 살기엔 살 날이 너무 창창해서

아기엄마의 투병일기

벌써 한 달여 전의 일이네요.

아이와 함께 부산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알렸더랬죠. 부산 시의회에서 개최된 <젊은 유방암 경험자를 위한 일자리 정책 토론회>에 패널로 참여하러 간 게 가장 크고 중요한 일정이었어요.

저는 30대 젊은 유방암 경험자를 대표해, 경력이 단절되고 출산을 경험하고 아이를 키우며 투병생활을 이어가는 환우들의 이야기를 정책입안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자칫 너무 공허한 소리를 하며 억지소리를 한다 비치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요, 그간 부산지역에서 젊유애가 활동한 영향인지 관계자분들의 이해도가 높아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관련기사도 여럿 나왔었답니다. 지금도 인터넷 포털에서 젊유애 라고 검색을 하시면 2페이지 정도에서 찾으실 수 있어요. 저는 한국경제 기사를 살포시 남겨놓을게요. 글에 나오는 30대 유방암 환우가 저입니다.



젊은 유방암 경험자 사회복귀 및 일자리 정책 토론회 개최 (한국경제 2020.11.10)

당시 토론회가 공식적인 자리이기도 했고, 유튜브로 생중계되기도 해서 참 말을 많이 골라가며 신중하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요.  

사실 20대들은 실비라던가 암보험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죠. 그런 상황에 암에 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부모님께 기댈 형편도 되지 못한다면 정말 눈앞이 깜깜해질 겁니다. 의료보험이 잘 되어있는 우리나라라지만, 산정특례를 받아도 스스로 벌어 병원비를 대고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만약 상황이 1-2년 사이에 표준 항암이 끝나지 않고 투병 기간이 더 길어진다면, 치료 이후는 더욱 암담하죠. 대략 20대 중반에 발병을 했다고 가정을 하고 5년간의 치료 기간을 마친 후 생존했다고 치면 20대 후반에서 30대입니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불합리함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직도 취업시장에서 여성은 약자이지요. 경력이 부족한 20대 후반의 여성을 어느 기업에서 채용할까요? 그럼, 이 젊은 환우는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앞에 언급한 실비보험 이야기를 생략했었습니다. 자칫 사보험의 중요성에 방점이 찍힐까 봐서요. 근데 정말 놀랍게도 부산지역 청년 일자리를 담당하시는 공무원분이 먼저 이런 사례를 언급해 주셨어요. 젊은 사람들은 암과 같은 상황에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확률이 높다고요. 그리고 생존율은 높아져서 사회로 복귀해야 하는 건 암 생존 이후에 따라오는 또 다른 생존이 문제라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계시더라고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저는 "암"이라는 말이 갖는 벽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게다가 같은 여성들에게도 생소한 "유방암"은 더욱 먼 나라 이야기지요. 그래서 자칫 허공에 뜬구름 잡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거든요. 근데 그 벽이 정말 많이 허물어져있었다는 걸 그날 부산에서 확인한 거죠.



그날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저는 젊은 암 환자의 사회복귀는 비단 유방암 환우만의 문제가 아닌 세대차원의 문제임을 강조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이 논의의 시작이 유방암 환우들에게서 나왔지만, 사실 이 문제는 성별과 암종에 관계없이 30대의 우리들이 겪어내는 사안이라는 것이죠.


모든 30대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30대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요. 한창 일터에서 자리를 잡고, 삶에서도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가장 열심히 벌어 가장 많이 지출을 하며 앞으로 20년 이상은 더 소비경제를 지탱해야 하는 사명을 어깨에 두른 세대이고요.
그런 30대들의 암 발생률이 드라마틱 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저는 만 2세인 딸을 키우며 새롭게 일을 시작하려고 손을 댄 프로젝트를 마치자마자 발병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임신 중에 알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출산 후 육아휴직 중에 발병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더군요.
암은 치료해야 하고, 아이는 키워야 하며, 일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게 30대의 우리입니다.

제 투병일기의 부제를 혹시 아실는지요. 바로 <독박 육아 독박 항암>이에요. 어딘가 기댈 언덕이 있지 못하다면, 아이를 독박 육아하면서 항암치료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게 30대의 우리들인 거죠. 그래도 저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입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아이를 키우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환우들도 있거든요.

발병 초기, 매일 밤을 유방암 환우 커뮤니티를 떠다니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게시글을 본 적이 있어요.
다들 보험금으로 나를 위한 선물 어떤 거 하시느냐고요. 어떤 이는 명품 시계를 샀다 하고, 어떤 이는 가방을, 어떤 이는 해외여행도 있었어요. 정말 어마어마한 댓글이 달려있었는데요, 그 끝 즈음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들 좋으시겠어요. 저는 보험이 없어서 병원비가 벅찬데요." (정확한 워딩이 아닌, 이런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든든하게 사보험이 들어져 있고, 딱히 내가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가장 좋습니다. 내가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도, 외벌이로 집을 마련하고 유지하고 아이들 교육하며 살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럼에도 일이 하고 싶거나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맞벌이를 꾸준히 하며 커리어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탄탄하게 쌓아온 지인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문직 여성이었어요. 어쩌다 암에 걸렸고, 그래도 어떻게든 빈틈없이 아이를 키우며 치료를 마쳤습니다. 5년이 지났고 생존했고요. 그러고 나니 돌아갈 자리가 없더군요. 경력이 좋아도, 전문직이어도 5년 치료의 벽은 넘기가 쉽지 않은 거죠.

왜 돌아갈 자리가 없을까요?
육아휴직을 하다가 암에 걸린 걸 알고 병가를 신청하려고 한다면, 어느 회사에서 그걸 달갑게 받아줄까요.
경력이라는 무기가 있는데도 이 정도인데,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20대의 상황은 어떠할까요.

하지만 이건 비단 유방암 여성 환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30대 남성들도 다르지 않아요.

저희 아이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한 지인의 가정은 남편이 암에 걸려 치료를 하는 동안 병가가 아닌 육아휴직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병가가 없어서 못 쓴 게 아니에요. 돌아가서 다시 일 할 것을 생각하자니 도저히 병가를 낼 수 없었던 거였지요.
그래서 이 문제는 유방암에 걸린 여성들의 문제가 아닌, 이 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인 20-30대의 세대 문제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유방암은 재발이 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생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지요. 근데요, 재발을 염려하며 평생 암 환우답게 몸을 사리며 살기엔 우리가 살아갈 날이 너무나 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기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고요. 암을 이겨내는 것도 생존의 문제인데, 암생존 이후 또한 만만치 않은 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암 발병률은 점점 높아지고 암에 걸리는 연령대도 계속 낮아지는데, 암 치료제는 계속 좋아지고 있어서 생존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단체사진 맨 왼쪽, 정수리와 콧대만 보이는 사람이 접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토론회를 주최하고 주관한 주체 중 한 곳이 바로 젊유애 입니다.
젊은 유방암 애프터케어의 줄임말이죠.
1년여 전에 젊유애를 만났습니다. 단체 홍보에 사용할 유방암 환우의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러 간 게 인연의 시작이었어요. 그때는 전신항암을 마치고 표적항암 중이어서, 머리가 아주 짧은 숏커트 정도로 자라있었지요.
당시의 저는 만 3세 어린이를 키우며, 국가 사회복지망의 사각지대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기분이었는데요. 아무래도 국가검진 개시 연령 이전에 걸린 젊은 유방암 환우들은 복지망에서 상대적으로 열외 되어있다는 사실에서 서지연대표와 이야기가 잘 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야기 나눴고 들었던 것들이 이제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젠 여성가족부 산하의 비영리법인이 되었네요.
젊유애의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져서, 비영리단체 젊유애에서 이제는 비영리법인 쉼표입니다.

쉼표.
암을 앓는다는 것이 인생과 일상의 마침표가 아닌, 잠시 쉬었다 가는 쉼표라는 의미입니다.

맞아요. 그래야 합니다.
암에 걸렸었다는 이유로, 언제까지나 "암 환우답게"(라는 지금까지의 관념대로) 몸을 사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챙겨야 할 가족이 있고, 아직 하고 싶은 일과 꿈이 있으니까요.


https://n.news.naver.com/article/082/0001048008


코로나19로 또다시 아이의 어린이집이 휴원에 들어갔습니다. 상황이 좀 심각한 것 같아, 이번에는 긴급 보육도 못 보내고 하루 종일 집에서 가정 보육 중입니다. 게다가 마침 남편의 회사에서 확진자가 발생해, 일주일 중 어떤 날은 남편의 재택근무 뒷바라지로 삼시 세끼 3인분 식사를 차려야 하네요. 하루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즘입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을 접했어요.

기사가 나왔다고요.
아마도 젊유애가 비영리법인 쉼표가 된 이후 나온 공식 기사가 아닐까 싶은데요.
무려 지역 유력 일간지 전면을 차지했더군요.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제 정수리가 오늘 하루는 부산 전역에 인쇄되어 돌아다녔겠어요.

오늘 이런 뭔가 뿌듯한 일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사실 관련 기사를 느긋하게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잠에 든 밤에야 제 시간이 생겨 자리를 잡고 읽어보네요.
기사의 말미가 저의 감각과 의지를 건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좀 더 오래 살아봐야겠습니다.



언젠가, 아이를 데리고 멀리까지 오가며 발언을 해주어 고맙고 대단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서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적어도 제 뒤에 오는 누군가는 저 같은 고생은 안 하겠죠." 라고요.
진심입니다.

부산 토론회에도 아이와 함께... 이것은 독박육아맘의 길...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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