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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r 31. 2021

편견을 깨고 나오니 봄이 보였다

아기 엄마의 투병일기

함께 일하게 된 단체가 스타급 정치인이 함께하는 사단법인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보다 더 들뜬 남편이 다섯 시간째 말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자기가봐도 자신이 후원하는 곳이 참 일을 못한다며 탈당을 할까 말까 별 의미 없는 말도 간간이 들어가고 말이다.  그의 길고도 긴 너부리 안에는 우리가 의외의 인물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도 좀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정당에 대한 선호가 딱히 없다.

당만 다를 뿐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시민이 시민의 힘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내 손으로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졌던 시절이 있었던 것 또한 저런 성장배경에 기인한 것이었을 테다.

그마저도 처절한 실망으로 마침표를 찍은 후, 더더욱 나는 실존주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중요한 명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정치인을 만난 첫인상은, 진심으로 우리가 들고 온 사안을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풀어내고자 그 순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뭘 해드리면 됩니까? 네네 나중에 뵙지요." 같은 사진 찍기용 대화가 아니어서 참 고맙고 좋았다.  

"제가 잘 몰라서 묻는 거니 오해 마시고요."로 시작하던 그날의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젊은 사람들이 너무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고, 국가검진 같은 보호 시스템 안에 들어가지 못해 어렵다는 것.

이제 사회에 나왔고 결혼했거나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청년 또는 부부 중 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온 가족이 재난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

그래도 의료기술이 좋고 약도 좋아져서 어떻게든 생존해 암을 치료하고 병원 밖으로 나오는 생존자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

그럼에도 암에 걸렸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다시 사회로 돌아가 일을 하고 살기가 요원한, 지독하게도 냉정한 편견의 벽.

이, 별로 이해가 어렵지 않은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 드물었다.

화두를 여성암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이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여성만이 아닌 2030 젊은 세대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특혜가 아니라 사각지대에서 복지안전망 안으로 올려주는 것뿐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을까.

지난가을, 젠더가 아닌 세대가 처한 복지사각지대의 문제임을 공식석상에서 이야기한 지 5개월 여가 지나서야 뭔가 변화의 윤곽이 보인다.



이야기와 서류가 오간 후 MOU를 체결하던 날은 2년 전 돌아가신 아빠의 기일 전날이었다.

기일 당일에 엄마와 가면 종교적 이유로 묵념도 못하게 하고 분향도 못하게 할게 뻔해서 인근에 간 김에 먼저 다녀왔다. 아빠를 모신 충혼당 납골당 앞에서 아빠가 참 좋아하셨던 정치인과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아빠 생각이 참 많이 나던 날이었다.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면 누구보다 기뻐하시고, 더욱 신중하고 진중하게 일을 처리하라며 여러 조언을 해주셨을 테다. 공명심에 들뜨지 말고 그 일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와 세상에 끼칠 유익을 맨 앞에 두라 하셨을 것이다. 분명 이런 말씀들을 하셨을 것 같은데, 그 구체적인 메시지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아빠는 보훈 유관단체의 장이셨고 존경받던 기업가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문전성시까지는 아니었어도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종종 있었다.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갔을 때 아빠의 지지와 뒷배로 도움을 좀 얻기 위한 이들이었다. 아빠는 그 누구의 손도 잡아주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늘 무엇 하나라도 연을 맺어 같이 가려했다. 그래서였을까. 정당을 불문하고 어차피 다 똑같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너무 어려서부터 했던 것 같다. '저런 사람들이 그렇게 기회를 잡아 정치를 시작하니 나라가 이모양이지.' 이런 생각 말이다.  

학교에서 정치와 노사분쟁을 분석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뉴스와 신문에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치와 언론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속으며 사는 것일지 생각하며 살았다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프레임에 갇혀 사는 오징어였다. 정치에 대한 신뢰 여부와 관계없이 정치란 것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또한 딱히 없었다. 특히나 제대로 알아 들어주는 이 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제 사람들이 정말 많은 말들을 할 거야.

손짓 하나 발짓 하나 다 조심해야 해.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젊은애들이 정치 맛은 일찍 알아서 저렇게 일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온갖 말을 할 거야."

...

다섯 시간 가까이 혼자 떠들던 남편이 이 말을 남기고 잠을 청하러 들어갔다.

그런 오해는 이미 듣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더 들을지도 모르겠다.



지인에게서 추천받은 책이 도착했다.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에 대한 고찰이 담긴, 서문부터 훌륭한 책이었다. 늦은 오후, 아이와 공원 산책을 나갔다가 오랜만에 단골 카페에 앉아 책장을 열었다.  

"극적인 본능과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의 원인을 논하는 장이었다.

저자는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었기에 그렇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세계관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츰 뭔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찾던 무지는 업그레이드 문제만이 아니었다. 명확한 데이터 영상, 좋은 교육도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있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강의를 무척 좋아한 사람조차 내 얘길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영감을 받았을지 몰라도 강의가 끝나면 기존의 부정적 세계관에 갇혔고, 새로운 생각이 그들 머릿속에 자리잡지 못했다....
나는 거의 포기상태가 되었다.” - 팩트풀니스 일부 발췌



책을 읽으며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정당을 타는 이슈가 아니니까." 라며 운을 뗐던 그 정치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인 것 같다. 더 이상 설득을 하다가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기도 했다.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고 모두가 우리와 같지는 않기에 정말 많은 의견을 듣게 되겠지만, 제도와 사회인식의 개선을 목표로 잡았다면 방향은 분명하다.

남편은 내가 암투병을 하던 기간 동안 어린아이와 아픈 아내를 부양하며 살아낸 그 시간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캄캄하고 끝도 없던 터널" 같았다고 했다. 우린 그 터널을 지나왔지만, 또 다른 젊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를 둔 가정, 새파랗게 젊은 자식의 암투병을 지켜봐야 하는 노부모들이 아직도 그 터널 안에 있다.



도로를 새로 포장하려는지 모든 길이 비포장 상태가 된 동작동 국립묘지를 걸어 내려오며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저렇게 스마트한 정치인들이 있었다고.

정치란 무엇이며 과연 옳다는 것은 무엇에 기반한 신념일까 한참을 중얼거리며 그 산을 내려오다 눈을 들어보니, 현충원 안에 봄이 들어와 있었다.

봄이다.

끝없는 터널은 없듯이, 끝없는 겨울도 없다.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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