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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Apr 07. 2021

그동안 수고 참 많으셨습니다.

아기엄마의 투병일기

"1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편과 둘이 앉아 와인잔을 부딪히며 나눈 인사였다.   결혼기념일이면  말이 서로 주고받는  마디인  같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린 결혼 첫해부터 그랬다. 이 성질머리 데리고 살아줘서 고생 많았다는 말을 서로에게 했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결혼 8주년 기념일이다.

8년 전 오늘은 비가 왔다. 그 비를 머금은 벚나무들이 우리 결혼 후 일주일 후에야 온 세상을 벚꽃으로 물들였더랬다.


나는 10월의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냥 김동규 님의 그 곡이 너무 좋아서, 그냥 10월에 결혼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우리는 4월에 식을 올렸다. 기왕 4월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벚꽃이 흩날리는 4월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해의 벚꽃은 우리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 주에야 만개했다.


돌이켜보면 순탄한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이었다.

시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제사 없애주신 ) 힘입어 결혼을 했지만, 결혼 후에는 시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이혼을 각오해야 했었다. 순탄하게 아이를 임신해 출산을 했지만 나는  암에 걸렸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항암주사를 맞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녔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지나고 보니 벌써 우리가 결혼한 지 8년째. 내년이면 아이가 학교에 간다.


오늘은 아이의 소아안과 외래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안과로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명의가 있는 대학병원에 방문하는 날이다.

교정시력이 0.05 나오지 않았던 눈이 0.5까지 올라갔다는 소식에 눈물 나게 감사한 날이었다. 시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교수님의 칭찬에 아이도 신이 났다. 신이 나서는 칭찬 받았으니까 짜장면을 사달라고.

서울성모병원 지하에는 짜장면 집이 있다.

유모차에 앉아  짜장면을 적잖이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남아있는지, 당당한 걸음으로 아이가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그랬다.

 병원 지하에서 방사선치료를 받았었다.

본원이 멀어서 비교적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방사 전원을 했는데, 정말  문제는 본원까지의 거리가 아니라 아이의 어린이집이었다. 외벌이 외동 가정이라 어린이집 입소에 가점을 받을  없었다. 다니고 있는 영아전담 어린이집이 있었고, 다음에는 선배들처럼 우리도 국공립 어린이집에 티오 나는 순서대로 입소하면   알고 있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해에 관내 유치원  곳이 폐원을 해버리면서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이동하는 인원이 줄어버렸다. 당연히 우리 아이를 비롯해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던 친구들 모두 그야말로 멘붕 상황이었다. 나는 당장 항암치료 중이고 방사선치료를 병행해야 하는데, 국공립 어린이집은 대기 150 중에 150번이 우리 집이었고 조금 일찍 병설유치원으로 보내기엔 하원 시간이 너무 일렀다. 고민 끝에 협동조합 어린이집으로 갔는데 이곳은 시간 연장이 없고, 무엇보다 아이가 적응을 너무 힘들어했다. 기관   옮길 때마다 적응하는    가까이 걸리는, 보기보다 예민한 아이가  딸이었다.

가뜩이나 예민한데, 엄마가 아픈건 알아서 매일 엄마가 죽어 사라져버릴까봐 무서워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녔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유모차에 아이를 앉히고 벨트를 꼭꼭 매어놓고,  손에는 핑크퐁 영상이 나오는 핸드폰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간식을 쥐여주고 방사선치료실로 들어가기를  번이나 했던가. 나중에는  시간마다 마주치는 다른 환우분들이 아이에게 간식과 인형 선물을 주시기도 했으니, 정말 아이 데리고 많이도 갔었나 보다.

 시절, 칭얼대는 아이를 데리고  지하의 식당들을 많이도 돌아다녔었다.

짜장면도 먹고 카페에도 가고, 오렌지주스도 사주고.


방사선 치료를 마친 , 한동안  병원에  일이 없었다.

방사선치료를 마친 바로 다음날 아버지가 소천하셔서 사실  병원에  때면 만감이 교차하는 것도 사실이다.  시절 아이 손을 잡고 미사실에 앉아 얼마나 기도를 했던가.

신은 내가 바라던 기적은 일으켜주지 않으셨지만, 적어도 일상으로 돌아갈  있는 은혜는 베풀어 주신 듯하다.


2년 전 그때는 아픈 엄마를 따라다니느라 허기지고 불안한 아이에게 적당히 챙겨 먹이는 식사 대신이었던 짜장면이었는데, 이젠 병원에 와서 눈이 좋아지고 있다는 칭찬에 따라오는 상인 짜장면이 되어버렸다. 같은 장소 같은 자리에 앉아, 이젠 스스로 잘 먹는 아이를 보다가 문득 이런 게 일상이라는 사실에 왈칵 눈물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에서 남편을 만났다.

뭐랄까, 아이가 클수록 패밀리레스토랑이  패밀리 레스토랑인지   같은 기분이다. 정말 어린아이를  가족 식사에  맞는 곳임을, 아이가 클수록 느낀다.  결혼기념일 기념식사는 어디 호텔 뷔페라도 가야 한다 생각했던 부부가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 싶어 실소가 났다.


 먹는 세트로 주문을 하고,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며 와인도 주문했다.

아이는 결혼기념일과 아빠 생일을 혼동하는지 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을 불러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음식을 앞에 두고 와인잔을 부딪히며 남편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도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었다.


남편은 우리 가족이 지나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겠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온  같았다고 했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떻게 그 시간 동안 저 사람과 손발을 맞춰 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사실, 개미허리만큼은 있다. 아마 그 역시 나와 같으리라. 그러니 둘이 앉아 서로 '내가 고생을 했다-'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있었겠지.


부부는 원래 닮는 건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지지고 볶으며 더 닮아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서로 너와 내가 고생하고 맞춰가며 만들어 온 현재에 감사할 줄 알아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느 평범한 결혼기념일의 일상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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