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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맛구름 Jul 08. 2024

독립

음파음파


결혼 전 나는 가족친화적이기보단 바깥세상과 친화적이었다. 뭐, 사실 살아가려면 아니 살아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없는 형편에 미대로 진학을 해서 예술가의 길로 가지도 못하고 등록금 마련하기 바빴던 기억만 대부분이다. 근로장학금부터 성적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 해서 열심히 했다. 열심히만..

슬픈 얘기지만 2009년 졸업한 내가 4년 동안 받았던  학자금 대출을 작년에 다 갚았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이나 할랑가? - 공부는 아빠가 시켜준다며 큰소리치던 사람이었다. 결국 난 내가 벌어 학교 다닌 거고, 미래의 남편이 공부시켜 준 셈이 되었다.

그렇게 졸업 이후에도 돈 버는 일이 바빠 바깥세상과 친화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가족친화적인 사람이 돼버렸다. 큰언니는 서른이 넘어 독립해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작은언니는 도피를 가장한 결혼을 하고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행을 택했다.

등 떠밀린 셈이다. 그래도 부모옆에 자식하나는 가까이 살아야 하지 않냐며. 진짜 독립해야 마땅한 시기에 난 그렇게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친정부모님을 모셔놓고 효도코스프레를 시작. 주기적인 아빠의 꼬장과 폭력으로 괴로운 엄마를 위로하는 역할에 가장 충실했던.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지 못한 부모 뒷바라지까지.

기억을 더듬어 기록한 순간부터 진짜 내 남편 10년 동안 안 봐도 될 못 볼 꼴부터 경제적 피해까지 다 보면서도 싫은 내색 안 했던 사람. 복 받은 건지, 아니면 내가 눈치가 없는 건지. 이젠 미안하단 말도 염치가 없을 정도니까.


그렇게 두 집 살림 10년 차에 부모는 정말 온갖 흙탕물을 튀겨가며 싸우다 70이 넘은 시기에 이혼을 택했다. 그런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처럼 가장 너덜너덜 해진 건 나였다.

10년 차곡히 쌓인 빚이 내게 온 것도 모자라, 아무리 효도코스프레였다 해도 난 정말 최선을 다해 부모를 모시고 섬겼는데도 난 천하의 죽일 자식이 돼버렸고, 죽일자식 옆에 있던 남편은 그저 개새끼가 되었다.

그때 알았다. 부모 자식은 천륜이라지만 당연한 건 없다는 걸.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게 자식이구나.

결혼 10년 차, 내 나이 서른아홉에 그렇게 진짜로 독립했다.


아빠 엄마의 이혼과정에서 혹여나 엄마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싶어 난 24시간 감시자 역할을 했었다.

떨어져 지내는 언니들은 감시자의 보고를 받으며 안심했고, 그 시간은 결국 나를 갉아먹었던 시간이었다.

엄마의 회복을 위해 보냈던 수영장.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해 어느 날 문득 나도 들어가지 뭐 하고 첫 발을 내디뎠던 수영장.


슬픔은 수용성이라더니. 물에 몸을 맡긴 순간 그냥 다 잊어졌다. 그 순간뿐이더라도.

울어도 티가나지 않았고, 울면 물이 위로했다. 그렇게 흘려보내라고.

진짜 독립한 서른아홉, 그렇게 난 물과 친화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무언가 배우기로 결정한 위대한 순간이었지 싶다.


세상에 첫걸음마를 내딛는 아이와 같이, 숨 쉬는 법부터 헤엄쳐 나아가는 방법까지 잘 배워서 내 나이 마흔에 진짜 행복한 독립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슬픔은 수용성이라 많이 녹았지만, 미움은 물먹는 하마처럼 늘어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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