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밤에 잠을 자다가 배가 몹시 아팠다. 아무래도 전 날먹은 대창덮밥의 마지막 대창 한알이 문제였던 것 같다.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식사를 하니 마음도 여유롭고, 무척 맛있었던 식사였다. 배가 터질 듯 부른데, 그 대창 한알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나의 젓가락이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그 한알의 대창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가하였다. 그게 화근이었다.
아이가 깰까 두려워 구역질을 틀어막고 살금살금 화장실로 갔다. 구토를 하고 나와,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채 소화제를 겨우 찾아먹었으나 허탕이었다. 20분 후 다시 구토가 나왔으니 약도 함께 나왔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배를 헤집는 것 같았다. 내 위를 걸레짜듯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애덤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활동을 조절한다고 했던가. 내 배를 조절하는 것 같은데. 졸음과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응급실에 가야할까,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나 혼자 그저 다녀오는 것이면 모를까 그로 인한 나비효과(아이들이 자다 깨는 것, 등원준비에 우왕좌왕할 남편, 피곤에 쩔은 채 출근하는 남편, 첫째의 나홀로 하교 등등)가 상상이 되었다. 아서라. 자리에 누워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내 배를 문지르듯, 스스로 열심히 문지르니 위경련이 조금 나아졌다. 겨우 잠에 빠져들려는데 갑자기 어릴 때는 왜 그리 자주 배가 아팠을까?라는 질문이 다시 머릿속을 걸어다녔다.
마치 신생아가 배앓이를 하듯 유치원,초등학교 때는 배가 너무 자주 아팠다. 한번 아플 때 꽤 심하게 아파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크면서 배아픈 횟수는 확연히 줄었다. 아이들의 소화기관이 미성숙하니 그랬었나보다.라고 나름의 결론을 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아이때는 다 그렇게 자주 배가 아팠겠지.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이 둘을 키우며 알았다. 내 아이들은 신생아때 (아마도) 배앓이를 심하게 거친것 같다. 그런데 말로 표현을 하기 시작한 뒤로는 특별히 배가 많이 아프다는 소리는 썩 하지 않았다. 손에 꼽게 배탈이 난적은 있어도, 어린 시절의 나만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도달한 다른 결론은, 예민한 성질과 과민한 장을 가진 아이가 밥보다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밥을 하루 한 끼 겨우 억지로 먹고, 간식은 쉬지 않고 계속 먹었다. 당시 나를 돌봐주던 할머니는, 간식좀 그만 먹이시라는 우리 엄마의 잔소리에 이렇게 대답했다한다.
"애들이 밥을 안먹는데, 이거라도 먹어야지 어떡해!"
요즘같은 육아상담 프로에 나갔다면 아마 할머니의 태도를 고치시라고 솔루션을 받았겠지.
성인이 된 후작은 스트레스에도 여기저기 잘 아픈 우리 자매에게, 엄마는 한숨쉬며 말했다.
"너네가 나이 많은 나보다 어떻게 더 아픈것 같다. 너네 어릴 때는 잔병치례는 없었는데, 나이들수록 왜 이리 자주 아픈 것이야. 아무래도 어릴 때 몸에 안좋은 간식을 너무 많이 먹었던 게 지금 문제로 나타나나봐. 어휴~얼마나 달고 살았니."
그러던 엄마가 언젠가부터 우리가 아프면
"내가 너희를 정성껏 키우지 못한 것이 미안하구나."
라고 말한다. 그 말 한마디에는 정성스럽게 밥을 못챙겨줘서 미안하다는 뜻과, 너희의 예민함을 몰랐다는 뜻이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며, 우리 엄마도 늙어가는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 엄마가 엄마답지 않아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듣는데, 위로받는 기분이 아니고 속상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잠이 들었다가, 두시간 뒤 다시 배가 아파 깼다. 그 날은 잠이 들기 전에도, 잠든 후에도 "복통, 보이지 않는 손, 할머니, 간식, 엄마, 엄마나이." 그 생각의 꼬리가 물레방아 돌듯 계속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