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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작 Apr 10. 2024

직장인인 듯 직장인 아닌 직장인 같은...

17년차 라디오작가의 직업 고찰 - ‘공휴일’ 편

  며칠 후면 엄마의 칠순 생신이 돌아온다. 그렇지만 ‘우리 엄마가 벌써 칠순의 할머니라니!!!’ 뭐 이런 종류의 놀라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음력 생신을 쇠어 오신 엄마는 연초에 새 달력을 걸 때마다 당신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의 생신을 미리 확인해보시곤 한다. 물론 나는 엄마와 다른 ‘요즘 것들’답게 스마트폰 캘린더 앱에 양력과 음력을 잘 구분해서 저장해두고 아주 편리하게 기념일들을 관리하고 있다. 올해도 스마트한 어플이 나 대신 기억해 줄 엄마의 생신이 내 생일 다음 주중에 돌아온다는 정도만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설날에 만난 엄마 아들(=나의 혈육인 오빠)에게 올해가 엄마의 칠순이라고 이야기하니 날짜가 언제냐고 묻는다. 나도 정확한 날짜는 봐야 아는지라, 똑똑한 달력 앱을 보고는 “4월 12일.”이라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엄마 아들은 달력도 보지 않은 채 “금요일이네?”라고 말한다. 똑똑한 달력앱을 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금요일인 걸 어떻게 알아?” 그러자 엄마 아들이 말한다. “4월 10일이 수요일이니까, 12일은 금요일이겠지.” 그때까지도 똑똑한 달력앱을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4월 10일이 빨간날인 걸 발견하고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 국회의원에 출마할 것도 아니면서 두 달 전부터 그 날짜와 요일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나의 혈육, 그 이름은 바로 ‘직장인’이었던 것이다. 모친의 칠순 생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빨간날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달달 암기하고 있는 게 직장인의 극명한 뇌구조임을 혈육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껏 라디오작가인 나도 반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이나 공휴일엔 고정적인 일이 없는(이라고 쓰지만 사실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더 많긴 하다). 지금 맡은 방송은 월~금까지만 편성되고 주말에는 쉬는 방송이라 더더욱 주 5일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고, 과거에 월~일까지 꽉 채우는 데일리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도 평일에만 생방, 주말엔 미리 녹음해놓은 것을 송출하기에(물론 그 녹음은 평일 중에 이뤄진다.) 공식적으로는 평일에만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직장인의 패턴과 유사해 보이는 직업이었다. 물론 초대석 사전인터뷰 및 질문지 작성을 비롯해 요일별 아이템 구상까지... 방송 원고라는 게 당일에 닥쳐서 다 작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게 많은 일이라 생방이 없는 날이라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주5일제로 돌아가기에 직장인과 유사한 패턴의 직업이라 할 수 있 것이다. 이렇게 분명 직장인처럼 매여 있고 절대 ‘프리’하지 못한 직업인데 ‘프리랜서’로 분류된다는 점에선 참 모순적인 직종이기도 하다.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라는 건 근로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를테면 4대 보험이라던가 유급휴가, 연말정산 소득공제, 퇴직금 등등-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사업자’로 분류되는 직종이란 뜻이다. 그리고 방송국에 고용된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매개로 맺어진 계약관계일 뿐이니,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언제든 졸지에 백수가 될 수도 있는... 참으로 불안정한 직업이기도 하다. 아... 어쩌다 보니 내 직업의 악조건에 관한 한탄으로 이야기가 새버렸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직장인과 유사한 패턴으로 살면서도 공휴일에 대한 인식이 직장인과는 결정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그 차이와 이유에 관한 것이다.     


  주 7일을 꽉 채워 편성된 데일리 프로그램이 주말에는 녹음방송을 송출하는 것처럼, 주중에 공휴일이 낀 경우에도 미리 녹음한 방송을 송출하는 경우가 많다. 빨간날이라고 방송까지 쉴 순 없지만, 방송을 만드는 근로자들-즉 방송국에 고용된 피디, 엔지니어 등등-은 노동법상 휴일을 보장받아야 하니 공휴일에 출근하지 않기 위해 미리 땡겨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빨간날이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 연휴로 붙어있는 달력을 볼 때면 공포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와~ 사흘간이나 쉴 수 있다!!”가 아니라, ‘헐, 사흘분을 어떻게 미리 땡겨 쓰지?’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만약 주말방송까지 녹방으로 이어지는 데일리 프로그램이라면 사흘간의 평일연휴를 위해선 5일분을 미리 녹음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생방은 생방대로 하면서 추가로 말이다. 내일의 휴식을 위한 오늘의 과로.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내일의 휴식은 어차피 며칠간 못 잔 잠을 몰아 자느라 사라져 버릴 것을... 예전에 나와 친한 어떤 피디는 “사흘을 쉬겠다고 3년치 수명을 깎아먹는 것 같다”는 말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직장인이 아니라 그렇다 쳐도, 방송국 피디야말로 직장인이면서도 휴일에 관한 인식이 일반 직장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참 특이한 직종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이유로 직장인만큼 휴일을 반기지는 않게 된 나로서는, 그동안 직장인의 마음을 반도 헤아리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또 하나의 일화가 있었다. 그건 바로 올해 2월 29일. 평년보다 하루가 더 주어지는 윤년은 마치 인심 후한 장사꾼에게 덤을 하나 더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냐는 내용으로 오프닝을 썼다가 “평일이 하루 더 있는 게 뭐가 좋아요?”라는 어느 직장인 청취자의 문자 사연을 받게 된 것이다. 아... 나는 정말 직장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헤아리려면 아직 멀었구나... 아니 그건 내가 직장인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영역이겠구나. 그 한 통의 문자가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기도 했지만, 어차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서야 모든 이들의 마음을 꿰뚫고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알기 어려울 다양한 삶의 영역들,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렇게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라디오작가라는 직업은 분명 커다란 매력을 지닌 직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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