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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pr 22. 2024

영국인에게 업무용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니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로 글쓰기에 모두 능통한 건 아니다. 한국어를 알아듣고 쓰는 건 비슷하지만, 그중에도 좀 더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수려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며, 뭔 말인지 모르는 삼차원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한국어를 어릴 때부터 써왔어도 그 후 습득하게 되는 단어의 수와 종류, 적절한 상황에 맞는 단어의 선택에 따라 그 사람의 언어 구사 수준이 결정되고, 그 외 문맥을 어떻게 읽고 요점을 파악해 지식을 전달하는가 등은 언어 수준이 아닌 지적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나 그 영역에서의 경험을 갈고닦는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한국을 나와 영국에서 산지 20년이 넘었다 (벌써!).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내가 영어는 잘할 거라고 예상하는데, 내 영어 실력을 따져보자면.. 


- Academic writing (논문 등을 쓸 때 사용하는 학술용 영어)에 익숙하다. 한국어로는 두 장 짜리 연구 프로젝트를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영어로 된 논문을 석박사 과정 동안 수없이 읽고 써온 데다가, 특히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매일 영어로 1,000자 이상도 써댔으니. 아마도 내게 가장 익숙한 영어 글쓰기의 형태일 거다. (물론 그것도 내 전공에 한해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 Business writing: 업무용 영어다. 직장 생활을 영국에서 처음 시작했기에 이메일과 보고서를 쓰는 방식을 한국어보다 영어로 먼저 배웠다. 매일 기본 100개가 넘는 업무용 이메일을 처리하다 보니 숨 쉬듯 익히게 된 영어 사용 방식이기도 하다. 


- Formal writing: 이걸 굳이 한국어로 말하자면 공문서나 계약서 등 법적 효력을 가지거나, 회사나 조직의 대외적인 입장을 발표할 때 쓰게 되는 영어다. 내 전공과는 무관한 분야인데 예전 공무원 시절부터 현재 직업까지 어쩌다 보니 법률팀과 협업하게 되는 업무가 많아 저절로 익히게 된 영어다. 


그 외 사적인 이메일에 쓰게 되는 Informal writing이 있다.  


내가 한국어로 브런치 같은 공간에 글을 써서 올린다는 걸 알고 있는 벨기에 친구는, 왜 영어로 쓰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는데 (그 친구는 벨기에인으로 영국에서 살고 있는 일상을 적어 올리는 영어로 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내 대답은 간단했다. 그런 일상적인 일을 글로 쓸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즉, 나는 업무와 관련된 영어 글쓰기에 익숙하고, 논문이나 보고서는 몇십 장이라도 쓸 수 있지만, 내 일상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한국어를 따지자면, 나는 이렇게 일상을 전달하는 글쓰기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업무용 한국어를 쓰는 것은 서툴다. 논문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고. 


이 논리는 당연히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영국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영어를 쓴다고 다 똑같은 영어를 쓰는 것도 아니요, 어떤 이들은 문법도 틀린 영어를 구사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일부러 말을 꼬아 쓰는 화법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용 영어에 서툰 직원들도 있다. 


보고서를 써오랬더니 무슨 일기 같은 글을 써오는 사람도 있고, 회의록을 작성하랬더니 말을 그대로 옮겨 적어 시나리오 같은 글을 제출한 사람도 있고, 상황을 요약 정리해 간략한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더니 전후 관계도 없는 두서없는 메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업무 지시를 위해, "tell them that we'd like to get it done by.."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we'd like.."부터 고대로 복사와 붙이기를 해서 써 보내는 직원도 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알아서 써넣으라고 일부러 비워둔 공간마저 그대로 복사와 붙이기 해서 보내기까지 했다.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거지. 


이럴 때마다 좀 곤란해진다. 

학부생들 에세이 지도 하는 것도 아니고, 막 사회생활 시작한 초년생도 아니면서 왜.. 


그리고 깨닫는다. 업무는 언어가 아닌 경험의 영역이란 걸 말이다. 내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몇십 장이고 보고서도 써보고 피드백도 혹독하게 받으면서 깨져보면 아주 저절로 요약 정리 하는 법을 배우게 될 텐데, 그걸 시킬 수도 없고..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적어보는 간단한 팁. (물론 사람의 성향이나 업무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업무용 메일을 쓸 때는 누가 내게 이 메일을 보냈으며 내게 뭘 원하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내가 답을 해야 하는 대상에 누가 포함되는지, 내 메일을 받고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지까지 계산을 한 뒤 보내야 한다. 


특히 참조 목록에 들어간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데, 모르는 이름이 있으면 그 사람의 해당부서와 직책을 미리 알아보는 것도 좋다. 보통 직원들은 참조란에 자신의 상사를 넣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때 가장 쓸모없는 이메일이 바로, "I don't understand, what do you want?"이라고 답하는 거다. 일대 일 메일이면 몰라도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포함된 이메일에서 그런 답을 보내다니. 


제 딴에는 이건 설명을 제대로 안 한 네 탓,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받는 입장에서는 기껏 메일을 써서 보내놨더니 제대로 읽지도 않고 시간 낭비나 시키는 무례한 짓이다. 특히 참조란에 많은 이들이 들어가 있다면 대놓고 '나는 메일을 제대로 읽지 않았어요. 사실 돕고 싶은 마음도 없답니다.'라고 광고하는 모양새가 되기도 쉽다.


이럴 때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면 따로 메일을 보낸 이에게 연락을 해 사정을 물어본 뒤, 메일에 논의한 내용과 내가 알아낸 답을 정리해 보내는 게 좋다. 


"I just talked to xx (thanks for the call/explanation) (지금부터 쓰는 이메일의 내용이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와 상호협의된 내용임을 고지하고, 덧붙여 우호적인 제스처도 곁들임). We identified that... (이런 문제가 있는데 - 혹시라도 나와 같이 이해를 못 한 이들을 위한 상황 설명).   Based on...., we agreed that...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합의된 다음 단계를 소개). 

@xxx, can you please... (콕 집어 누구에게 뭘 부탁하는지 자세하게 설명). 

This needs to be resolved by xxx, can you all please... (언제까지 일이 해결돼야 하는지 최종 데드라인을 알려주고, 이메일을 받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내게 답신을 해야 하는지 중간 데드라인도 확실히 정해줌)

If you have any question, please do let me/xxx know. (이렇게 이 일의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알려주서 사람들이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복잡한 상황이 터졌을 때 상황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라고 하면, 아예 소제목을 정해서 bullet point (글머리 기호)로 요점을 정리하는 것도 좋다. 예를 들면. 


"Background/ Their requests/ our challenges/ impacts / our options" 


하는 식으로 소제목을 정한 뒤 해당 제목에 맞게 상황을 분석해 요점만 보내는 거다. 아니면 워드나 ppt로 구체적인 상황 분석을 한 자료를 만들어 놓고, 이메일에는 이 자료를 링크한 뒤 Executive summary로 요점만 다섯 가지 정도로 써서 보내거나. 


개인적으로는 소설처럼 길게 'he first called me on xx day... he was very aggressive, and I told him that his demand was unacceptable but he didn't listen.." (그가 언제 내게 전화를 했는데, 그는 공격적이었고, 내가 그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말을 했는데도 듣지도 않았으며..) 이런 식으로 써서 보내는 업무용 이메일을 불호한다. 


사적인 이메일이면 몰라도, 업무용 이메일이 이런 식이면, 첫째,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둘째, 개인의 해석과 감정이 들어가 있기에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힘들며, 셋째, 그래서 뭘 원하는지 바로 읽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런 서술은 미팅을 할 때 듣는 게 낫지 메일로 보게 되면 읽기도 전에 다음 이메일로 넘어가고 싶어질 정도로. 


그리고 또 하나 당부하는 것. 

이메일은 증거가 남는다.  


그러니 아무리 상대방과 친하다 하더라도, 생판 남의 손에 내 메일이 들어갈 상황까지 고려해서 글을 써야 한다. 특히 외부업체에게 보내는 메일이라면 빈말이라도 상대방이 내 말을 회사의 입장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말을 잘 가려서 써야 한다. 나중에 괜히 회사 간 분쟁의 불씨로 타오르기 싫다면 말이다. 


거기다 의외로 영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 꽤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직책과 성향, 일의 경중까지 따져서 말을 잘 골라 써야 된다. 그거 잘못하면 순식간에 뒷담화로 'he/she is rude'라는 소리가 나도는 걸 들을 수도 있을 테니. 


결론은 이것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쓰라고.. 팀원들아..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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