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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라는 나라

2. 내게 너는 이런 나라다

by 민토리



사람으로 따지자면, 첫눈에 확 반할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콧대라던지 다부진 입매라던지 언뜻 보면 잘생긴 것 같기도 한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 걸게 하는 호감형이라기보다, 굳이 따지자면 냉미남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격식을 차려입은 것 같은데 해진 소매자락이라던가 빛바랜 단추 같은 게 좋게 말하면 인간미 있어 보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좀 허술해 보였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사람을 무안케 하는 침묵을 유지하지도 않았고, 실타래 감 듯 어떻게든 대화는 이어졌다. 그게 날씨에 관한 거든 그날 교통 상황에 관한 거든… 자기 의견을 강하게 어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걸 완벽히 숨길 재주도, 의향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친절한 것 같은데 때때로 아주 대놓고 무례한 행동이나 말을 해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래 자주 봐서 이만하면 좀 더 가까이 가도 되지 않나 했다가 날 선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일 것 같지도 않은 우리 사이에 선명히 그어진 선에, 그간의 친밀함이 순전히 내 착각이었나 싶어 실망, 배신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내비치는 냉소라던지 때로 아무것도 아닌 척 툭 던지는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말들도 익숙해지니 이젠 매력으로 보일 때도 있더라.


내가 알아왔던 것들과 사뭇 다른 그 느낌에, 그 '다름'을 너에 대한 호감이라고, 설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너에게 익숙해지니 너에게 속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모든 게 근사하고 좋아 보였던, 콩깍지 제대로 씌었던 시기도 있었다. 1-2월의 지독한 어둠에 진저리 치다가도 3월의 새벽 잔디밭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violet (제비꽃)과 수선화를 보면 다시 가슴 설레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 지독한 1-2월도 핫 초콜릿과 팬케이크만 있으면 왠지 로맨틱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어느덧 스콘에 잼과 clotted cream 중 뭘 먼저 바를 것이냐에 대해 열성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었고, Tea와 연관된 모든 대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던 너를 향한 내 열정도, 그리고 이제는 마치 내 눈의 일부가 된 줄 알았던 그 콩깍지도 시간이 지나니 사그라들고 빛바래 지더라. 늘 꾸물꾸물하고 흐린 너의 날씨는 핫 초콜릿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졌고, 너 역시 이젠 내가 편해졌는지, 아니면 이젠 내가 너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인지, 정말 별의별 모습을 다 보여주기 시작하더라. 고풍스럽고 전통을 유지하는 고집스러움이 도리어 고급스럽다고 느껴졌었는데, 그 뒷면에는 내 일 아닌데 뭐, 하는 견고한 개인주의도 있었고, 어차피 넌 절대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어, 하고 그간 알고 지낸 세월 따위 다 무색하게 피부색이,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볼 때면 문득 네가 정말 싫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 감정의 질풍노도를 다 지나서 지금 너와의 관계를 묻는다면... 아마도 우린 권태기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애증이 남아 있는, 그런 헤어지지 못하고 같이 사는 동거 관계랄까...



이게 이제껏 십오 년 넘게 내가 겪어온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축약된 감상이다. 영국은 지내본 시간에 따라 참 다른 감상을 남기는 나라다. 짧게 관광차 왔다 갔다면 런던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풍경에 감탄할 것이고, 대부분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 온 모습을 보고 그 우아하고 고고한 자태에 반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일 거다. 오래되고 낡았고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며 우월감을 뽐내거나, 혹은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정체됨. 그리고 책과 영화로 접할 때 분위기 있어 보이던 잿빛 하늘로 뒤덮인 거리 풍경이 얼마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지… 아마 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구르듯 흘러가는 영어 발음과 달리 새로 산 셔츠를 펼칠 때처럼 끊어지는 듯 부드러운 듯 들려오던 영국의 영어 발음은 정말 사람마다 다르며, 그들은 어쩌면 외국인인 나와 별 대화하려는 생각도 없을 거란 걸…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 영국이 얼마나 계층 차가 심한 나라인지,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그 계층의 어디에 속하게 되는지도…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은 어쩌면 단기간 영국을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장기간의 삶을 생각하고 있거나 실제로 살고 있다면 어쩌면 도움이 되거나 공감이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같은 영국/타지 생활하는데 저런 생각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살아남자, 그런 마음으로 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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