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양인 여자에 대한 흔한 환상 깨기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 2년 동안 대학원 학부 학생회, 그리고 대학원 총학생회 간부 생활을 했었다 (대학원 총 학생회 간부 - Graduate Union board member - 는 전체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투표로 뽑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행사를 주최하거나 참가할 때가 많았는데, 한 행사에서 파트타임으로 박사 1년 차를 시작한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40대 후반의 그 남자는, 그 당시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다가 더 늦기 전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행사에서 나는 주최자 중 한 명이었고 그 당시 박사 2년 차였는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그 남자가 내게 물었다.
"So what do you want to do when you grow up?" (넌 커서 뭘 하고 싶냐)
이건 또 뭔 웃기지도 않는 농담인가 싶어 웃어넘기며,
"I think I've already grown up?" (난 이미 다 큰 거 같은데?)
하고 대답하니, 어색하게 웃으며,
"You know, of course you are very young and…"
하며 얼버무렸다. 내가 무슨 영재라서 조기 졸업을 통해 진짜 어린 나이에 박사과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대화하던 무리에 있는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도 다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이거나 영국에서 정규코스를 밟은 친구들은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있는데, (영국에서는 정규 교육과정이 만 5세부터 시작하고, 대학 학부 과정도 3년에 석사도 1년이라 원한다면 한국보다 어린 나이에 박사까지 마칠 수 있습니다) 나만 저 질문을 받았다. 좋게 말하면 '내'가 아주 어려 보인다는 소리고,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나만 그 무리 중 '동양인'에 '여자'였기 때문에 더 어리게 취급당한 걸 수도 있다.
혼자 대학원에 유학 온 동양인 여자, 특히 한국 여자는 좀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대학원, 특히 박사과정을 하러 유학 오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간혹 부부가 같이 박사를 하러 오는 케이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남자가 많다. 여자는 수가 적을뿐더러, 남자들은 어찌어찌 한국의 학연 연결해가며, 아니면 선배 후배 해가며 술자리도 종종 가지면서 알아서 친해지는 거 같은데... 그렇게 형성된 자리에, 그들의 부인이 아닌 그들과 같은 박사생인 여자가 끼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한국인 여자 유학생들은 알아서 자기 나름의 인맥을 형성하게 되는데…. 한인들 사이가 아니라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도 가끔은 좀 애매한 대접을 받는다고 할까...
영국에서 아무리 인종차별에 대해 민감하니 어쩌니 해도 그 레이다를 벗어나는 인종이 있다면 아마도 동양인일 거다. 그러니까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친밀도가 있는 중앙아시아 쪽도 아니고, 잘 모르지만 워낙 인구가 많아 그냥 뭉텅이로 묶어두는 중국인이 아닌 그 외의 동양인들. 특히 일본이나 관광으로 잘 알려진 동남아 쪽도 아닌 한국인들. 워낙 모르니 대략의 '그렇다더라, 그럴 것이다'하는 스테레오 타입 식의 짐작들만 하고 있는 영국인들이 많은데… 그중 동양인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전형적인 수식어라면, 아무래도 "Nice, kind, polite, quiet, cute -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말이 없다, 귀엽다", 그리고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Passive - 수동적인"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서양인 여자들에 비해 체구가 작거나 마른 여자들도 많으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알게 모르게 "덜 자란" 취급을 받을 때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그들과 같은 학문적 위치에 있고 사실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지만, 그런 스테레오 타입적인 생각들과 그들 기준에 적용했을 때 상대적으로 체구도 작아 보이는 내가 그들 눈에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처럼 보일 수도 있단 소리다. 하긴 뭐 어리게 봐준다니 고맙긴 한데 어린애 취급까지 하니 문제지. 거기에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 아주 눈물 쏙 빼놓게 반박까지 못하면, 그들의 짐작 (얌전하고 말이 없다)까지 확신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이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간관계에서 끝나면 상관없는데… 가끔은 이런 인식이 유학 생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니 문제가 된다.
예를 들면 유학 생활 처음 석사과정 동안 토론이나 그룹 활동으로 이뤄지는 수업이라든지 과제 방식이 많았는데, 분명히 발표자료 다 나눴는데 막상 발표날 내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끼어들어 내 분량까지 다 해버려 사람을 완전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그래서 교수에게 '넌 그럼 준비한 게 뭐냐'하는 쪽팔림까지 당하게 한 그 X. 그래 놓고 내가 수업 후 따지니, 어차피 네가 긴장해서 망치는 것보다 내가 대신해줬으니 고마워해야 하지 않냐고 당당하게 말하며 나머지 조원들과 사라진 그 X. 그때는 진짜 돌 몇 덩어리를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박사과정 때 학회에 갔을 때는 같은 박사과정 하던 유럽인 남자 동기 하나가, "너는 대화 상대가 많아 좋겠다, 아무도 너에게 (학문적으로) 위협당한다고 느끼지 않을 테니" 하고 말하길래 또 잠시 혈압이 올라가기도 했고...
이렇게 영국에서는 토론을 통한 활동이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떨 때는 얼마나 내가 잘 말하느냐가 내 지식의 척도처럼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실제로 내가 토론 과정에서 끼기 좀 어려워 주저하다가, 혹은 타이밍을 잡지 못해 아무 말 못 하고 토론이 끝이 났다면, 사람들은 그런 내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어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었다 한들 인정을 받고 싶으면 - 첫째, 말을 해야 하고, 둘째, 내 말을 사람들이 듣게 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가끔 저 엉뚱한 '동양인 여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뜬금없이 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는 거다. 내 침묵을 당연하게 여겨서 아예 발언권을 주지 않거나, 아니면 내가 말을 하는데도 그 의견이 타당하든 하지 않든 'naive'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던지...
그래서 동양인 여자 유학생으로 살아남으려면 좀 더 독해져야 하고 좀 더 공격적이 돼야 한다. 같은 말을 쓰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여자가 '큰소리'내는 걸 좀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런 시선,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가 난데없이 외국에서 그것도 외국말로 공격적이 되고 목소리를 내라,라고 하는 게 좀 과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자면 한국을 나왔으니까 그래도 되는 거다. 영국은 그래도 되고, 내 밥그릇 챙기려면 그래야 하는 나라니까. 그러니 숨겨뒀던 내 안의 공격성을 꺼내서, 노래방에서나 내 보였던 우렁찬 발성으로 내 목소리를 일상생활에서 내는 연습을 하는 거다. 그랬는데도 누군가 - 국적을 불문하고 - 저 스테레오 타입의 잣대를 들이대려 한다면.... 간단히 말해주자.
나 너랑 썸타러 온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어려 보이든 말든 신경 끄고 내 말 들어. 내 말 귓등으로 흘리면 아주 후회하게 될 거야, 하는 앙칼진 마음가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