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어는 도구일 뿐
"He can't even speak English"
그 말에 잠깐 의문이 들어, "What's wrong with it?" (그게 왜?)하고 되물으니, 친구가 한나라의 수상이 영어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 뭐 그런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하는 친구의 얼굴에서 내가 이제껏 수십 번 봐왔던 익숙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그 표정은 주로 영어를 쓰는 원어민이 아니지만, 영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들에게서 많이 드러났던 표정인데... '야, 이것도 못해?' 하며 상대적으로 영어를 못하는 이들을 살짝 무시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월등한 자신의 영어실력에 대한 우월감을 은근히 드러내는 표정이다. 나는 친구에게 솔직히 한 나라의 수상이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연설을 하러 가서 자기 나라 말을 하는 게 왜 이상한 거냐고, 그리고 그 사람이 외교부 장관으로 영어권 나라에 가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영어를 잘해야 할 의무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영국처럼 영어권 나라에 머물다 보면 이렇게 '영어실력'으로 내 지적 수준을 시험/의심(!) 당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아니, 사실 영국에 살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지 않는가. 누군가 영어로 대화를 하면, '오~~'하고, 영어 발음이 좋으면 더 '오~~'하고.... 이거야 영어가 '공부'의 범주안에 들어가니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들리면 (사실 그게 무슨 논리도 없는 개소리라 하더라도...) 그래도 '공부 좀 했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영어가 주된 언어인 곳에서는 내가 영어가 서툴다고, 내가 아직 알파벳도 못 뗀 아이의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단 게 아닌데도 그렇게 취급받을 때가 있으니 하는 소리다. 예를 들면, 어학연수 때, 유학 생활 초기에 이런 취급을 종종 당했는데... 내가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바보 취급을 하며 자기들끼리 떠들던 우체국 직원이라든지, 아주 천천히 '구글'의 스펠링을 불러주던 남미 출신의 교환 학생이라든지 (아니 읽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박사과정 초기에 같이 봉사활동 가서 만난 어학원 선생으로 일한다던 유럽인 여자. 특히 그 여자는 자기가 원어민이 아니면서도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고질적인 직업병인 건지, 거의 2주가 가까운 봉사활동 기간 동안 툭하면 동양인의 영어를 지적하거나 대놓고 발음이 안 좋니 어쩌니 하며 놀림거리로 삼고, 주로 영국인 봉사자들과만 어울리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영어단어를 알고 있는지 뽐내거나 했다. 그러다 후반부에는 그녀의 지적질이 짜증 나서,
"Hey, I'm doing a PhD in Cambridge, so stop picking on my English" (야, 나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영어 가지고 지적질하지 마)
하고 툭 쏴주고는 봉사활동 주최자들에게도 그녀의 태도가 불쾌하다고 항의한 뒤 아예 무시하고 봉사활동을 마무리 짓긴 했지만.
솔직히 영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런 것들이 좀 아니꼬울 때가 있다. 자기들은 스페인이니 어디니 나가 살면서도 그 언어를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영국에서 만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영어를 하려는 노력은 당연하게 치부하고, 그러다 영어를 못하거나 서툰 외국인들은 무시하거나 가르치려는 자세. 아니 뭐 좋게 봐줘서 영어 발음을 교정시켜 주려 하는 거라든지, 내가 잘 모르는 영어 단어 같은 걸 가르쳐 주려는 건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가서 포크 잡는 법 따위를 가르치려 들거나, 기본 수학 공식 같은 걸 가르치려 들거나 이러면 짜증이 나는 거지. 야, 나도 정규 교육받았다고, 그리고 너보다 많은 언어를 쓰고, 내 전공에서는 너보다 더 잘 안다고. 내가 너한테 영어로 설명을 못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란 말이야. 막말로 나는 네가 살고 있는 나라도 알고, 언어도 알지만, 넌 내가 자라온 곳이 어떤지, 문화가 어떤지, 역사가 어떤지, 내가 무슨 말을 쓰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어린아이 취급은 좀 그만두자고.
이건 영어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영어는 그냥 언어 중 하나다. 소통의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만약 영어권에서 살고 있거나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일이 많은 직장에서 일하거나 일하고 싶다면 당연히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건 필수조건 중 하나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의 영어가 당신의 능력을 그대로 반영하진 않는다. 언어는 기본 기술일 뿐 일에 필요한 건 업무와 관련된 능력이니까. 그럼 영어가 필수조건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거나 일하고 있다면, 영어는 그냥 선택 조건 중 하나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대다수의 나라에서도 여행을 그냥 다닐 수 있는 것처럼, 굳이 영어를 잘해야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들이 훨씬 많으니까. 그러니 어설프게 영어로 그 사람의 지식의 척도를 가늠하는 건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라도 외국에 나왔다가 내 영어 발음이 어설프다는 이유로 국적을 불문하고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차별한다면 그렇게 말해주자.
"The fact that I don't speak English very well doesn't mean that I'm stupid"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내가 멍청하단 소린 아니야) - 그만해라, 혹은 꺼져라, 하는 살벌한 눈빛은 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