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경제적으로 궁핍하다고 당신의 삶도 그런 건 아니다
한국에서는 본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지방 국립대를 다녔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지만 매일 받았던 용돈은 교통비를 제외하고 3천 원이 전부였다. 교내 식당이 세 군데였는데 싼 곳은 학식이 1500원, 좀 비싸면 2000원 정도 했다. 대신 학교 밖을 나오면 기본 2500원, 3000원이었기 때문에 늘 점심은 학식으로 해결하고 그렇게 야금야금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거나 학과 행사 회비 따윌 내곤 했다. 대학 생활에 적응한 다음부터는 가족들 몰래 과외를 해서 용돈을 충당하거나 저금을 했고... 그러던 내가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체감했던 물가는 아주 뼈를 때릴 정도였다;; 1파운드가 거의 2000원 하던 때였으니 뭘 사려고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환율 환산이 되어서 도저히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학연수 때 첫 번째 집에서는 Half-board (숙박+아침+저녁)로 미리 돈을 지불했던 까닭에 아침에 내게 허락된 만큼의 모든 걸 먹은 다음 (보통 토스트 2조각 아니면 시리얼..), 점심은 물을 마시며 버티고, 저녁에 주는 밥으로 배를 채우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돈을 좀 더 아끼려고 집을 두 번 옮기면서 어학원과는 점점 멀어졌고 (걸어서 왕복 2시간..), 아침은 어떻게든 싸게 때울 수 있으니 저녁 한 끼만 숙식비에 포함하는 걸로 바꿨다. 그러다 정말 못 견디겠으면 다시 1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서 시내 외곽에 있는 AxDA (영국 슈퍼마켓 체인 중 싼 대형 슈퍼마켓)까지 간 다음 가장 싼 식빵이라든지 시리얼, 사과 같은 걸 사 와서 아껴 아껴 먹으며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영국에서의 생활이 좀 익숙해진 다음에는 알바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운 좋게 펍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봐야 대부분 주방 보조). 그래도 시급이 그 당시 한 시간당 4.5파운드라길래 아주 들뜬 마음에 시작했는데 (그 당시 최저임금이었는데, 실제로는 3파운드 좀 넘게 받으며 일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훨씬 많았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월급을 받으니 세금으로만 100파운드 정도 사라져서 아주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고 ㅠ_ㅠ (유학생이기 때문에 나중에 환급받을 수도 있는데, 본인이 직접 신청해야 하고, 절차도 까다롭고 시간이 꽤 걸린다 - 즉 단기간으로 온 외국인이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뜻). 어쨌건 그렇게 돈을 번다는 기쁨도 잠시, 들뜬 마음으로 주말에 가게들을 기웃거리다가 노점상에 걸려있는, 정말 허접해 보이는 장식품 하나가 5파운드 하는 걸 보고, 내 1시간의 노동이 저거 하나를 살 정도도 안된다고 막상 생각하니 왠지 억울하면서 순간 스스로가 참 하찮게 여겨지더라...
이토록 우울하고 배고팠던 어학연수 생활을 접고 다시 유학생활을 위해 영국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이 그다지 다르진 않았다. 다만 이때는 마음의 준비도 좀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케임브리지의 현실 상 궁핍하게만 살 수가 없었다 (진짜 세상에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자제들은 이때 거의 다 만나본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왕따처럼 도서관/방에서 공부만 하다 유학생활 접을 게 아니라면 케임브리지에서 사교활동은 거의 필수다). 그래서 생활비와 사교 활동비를 조절하며 살다가, 다시 생활비가 부족해지면 시리얼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하며 살다가... 박사과정 때부터는 대학과 컬리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외부 프로젝트를 받아서 알바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박사 3년 차부터는 한국에서의 지원 없이 아주 궁색하나마 경제적 자립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도 뭐 사는 건 비슷했다. 세일이 아니면 정가를 주고 옷을 사는 경우도 없었고, 신발은 늘 도저히 못 신을 때까지 신었고 (웬만한 건 어떻게든 혼자 수선을 했는데 아예 반토막 난 건 어떻게 해도 안되더라;;), 웬만한 생필품은 Charity shop 등에서 파는 중고로 해결했으며, 여전히 주말이 되면 30분은 족히 걸리는 큰 슈퍼마켓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기본인 가장 싼 것들을 골라와 식사를 해결했다. 물론 사교생활이 아주 큰 축을 이루는 케임브리지에서의 생활인 만큼 그렇게 아낀 돈은 그런 순간에 다른 이들과 아주 자연스레 어울리기 위해 소비되었지만... (물론 차라리 사교비를 줄이고 일상생활의 질을 높이는 게 더 낫지 않냐, 하고 누군가 물으신다면... 제한된 자원으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제가 우선순위로 둔 건, 주어진 환경의 장점 -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이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 - 을 최대한 누리고 이용하자, 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궁핍하고 궁색했던 유학생활이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배고플 때나 전기세를 아끼겠다고 난방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외투에 목도리, 모자까지 눌러쓰고 잠들었던 순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고 차별받았던 순간들이었다. 내 피부색 때문에, 내 억양 때문에, 내 말투 때문에, 내 모습 때문에 등등. 그렇게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냥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거나, 아니면 마치 내가 귀가 없거나 뇌가 없는 사람인 양 취급받거나. 그리고 솔직히 이건 영국이라는 곳의 장점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영국에서는 내가 뭘 어떻게 하고 다녀도 아무 신경도 안 쓰기 때문에 , 아무리 돈 많은 애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굳이 그런 것들이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영향을 준 적은 없다. 다만 나를 괴롭게 했던 건 나 혼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자격지심, 열등감 정도랄까...
어쨌건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게 있다면... 돈이 있건 없건, 영국에서 사람대접을 받으려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 내가 여기 당신 앞에 서있다는 것, 내게도 뇌가 있어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고, 감정이 있으니 당신 말에 반응할 수 있고, 내게도 귀와 입이 있으니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나 역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증명에 필요한 건 근사한 옷이라든지 잘 차려입은 모양새라든지 빼어난 미모 따위가 아니다. 아니, 솔직히 유창한 영어실력도 어쩌면 필요 없을 수 있다 - 가끔은 단호한 태도, 눈빛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으니까.. (특히 상대방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연습을 하자!! - 그렇지만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건 - 눈물을 비춘다던지.. - 영국에서는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조심!)
이토록 궁핍한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건 말건 그게 우리의 가치마저 규정짓는 건 아니라고. 물론 어떤 이들은 그런 것만으로 이미 우리의 가치를 멋대로 매겼을지 모르지만, 그런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의 가치를 우리도 저 바닥 어딘가로 매겨놓으면 된다. 그들의 예의 없음에 타당한 값을 지불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사실 의외로 '궁핍함'을 나타내는 건 내 유행에 뒤떨어진 옷이라든지 낡은 신발 따위가 아니라 내 태도, 눈빛, 표정이다. 주눅 든 듯 처진 어깨, 빛바랜 것 같은 눈빛, 지친 듯 피곤한 듯 굳어버린 표정 등등... 그러니 며칠 째 돈이 없어 시리얼로 (한국이라면 삼각김밥?) 끼니를 때웠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의 (스쳐 지나갈) 사정, 우리는 여전히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있고 그래서 당당하다!
(혹시라도 마음이 넓으셔서 제 경제적 사정을 걱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은 아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