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거리 재택근무는 온라인 게임하는 기분

쪼렙과 만렙의 레벨 차이

by 민토리

지금 일하는 영국 정부 기관은 보안을 꽤 엄중하게 따지기 때문에 건물 출입도 철저히 통제하는 건 물론 컴퓨터 역시 VPN (Virtual Private Network)를 통해서만 접속해서 일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고 회사 내라 하더라도 VPN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일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


이번에 스페인으로 오면서는 Security 팀과 여러 번 회의를 걸친 끝에 보안 장치가 하나 더 걸린 새로운 랩탑 (laptop)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예비용 랍탑, 회사용 모바일 폰까지.


그렇게 스페인으로 온 지 삼일 만에 남편과 나는 방 하나씩을 따로 잡아 각자의 집무실(!)로 만들었고, 그렇게 본격적인 원거리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내 하루의 시작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커피 한잔과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을 들고 집무실로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컴퓨터 (laptop)을 켜고 회사 아이디로 로그인 한 뒤 VPN을 연결하고, 보안장치가 따로 되어 있는 Virtual machine에 다시 접속한다. 그러고 또 하나의 확인 절차를 걸치면 그제야 내가 일하는 화면이 뜬다.


사내 채팅 망이 뜨면서 익숙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태창과 동시에 주르륵 뜨고, 메일들이 수북한 이메일 창이 뜨고, 회의 목록 알림 창도 뜨고, 정부기관 인트라넷 창까지 마지막으로 뜨면 하루가 시작되면서 그제야 나는 회사에 '출근'한 거다.


집무실 옆 창으로는 스페인의 한 겨울 햇살이 쨍하게 내비치지만, 어차피 화상 채팅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 블러 처리되었거나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백그라운드 화면이다. 가끔은 그것마저 없이 동그랗게 떠있는 사람들의 이니셜이나, 밝게 웃고 있는 상대방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고.


영국 시간으로 8시, 스페인 시간으로 9시에 출근하는 나는 때때로 점심시간도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회의에 참석하거나,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메일의 공격을 하나씩 처리해 없애거나, 마감이 임박한 문서들을 작성하고 검토하느라 바쁘게 보낸다.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흘러가고, 주위가 서늘하게 변하며 석양이 지고, 아이들이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그렇게 어둠이 깔리는 무렵에 '로그아웃'하면서 퇴근한다.


특히 최근에는 크리스마스 휴가, 연말이 맞물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바람에 아주 일이 미친 듯이 몰려서 매일 8-9시간의 근무시간을 유지하고 있는데 (누가 공무원이 쉬운 직장이라고 했던가!!!), 로그아웃하면서 컴퓨터의 번쩍이던 화면이 사라지고 어둠으로 물든 방안을 볼 때면 아주 묘한 기분이 든다.


이상하게 현실과 일 사이의 괴리를 느끼는 거다.


영국에 있을 때는 그래도 출퇴근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일하는 사람들과의 공통된 주제 - 주로 날씨 타령/ Local lockdown 소식 - 가 있어서 그런지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그걸 부쩍 느낀다. 공감할 수 없는 날씨 이야기, 코로나 바이러스, 브렉시트를 맞이하는 다른 체감 온도 등등.


그걸 부추기는 요소가 또 하나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지금 머무는 이 작은 스페인 마을에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다. 그리고 시골에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도 소문이 아주 빠르게 퍼진다. 거기다 아직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나는 빼도 박도 못한 외국인에 이방인이다.


영국에서의 내가 만렙 정도를 찍었다면, 스페인의 나는 고작해야 레벨 10 정도도 될까 말까 하는 쪼렙이다. 배달부가 빠르게 말하는 걸 알아듣지 못하고 과부하에 걸려 버벅대는 그런 쪼렙. 사람들이 내 앞에서 '저 사람은 말을 못 알아듣는대'하고 대놓고 수군거려도 차마 뭐라 반박할 수 있는 말을 딱 떠오를 수 없는 그런 처참한 수준의 쪼렙.


그런 내가 내 영국의 일터에 온라인으로 접속하면 순식간에 달라진다. 나는 능력 있는 만렙의 전사로 아주 용맹하게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지휘하고 사람들을 이끌며 결정을 내린다. 사람들은 내 의견을 묻고 존중하며, 설사 나를 얕보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내겐 그 사람을 엄중히 처단할 날쌘 혀가 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 일거다. 요즘 일하는 게 마치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게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로그인하는 순간 화려하게 몬스터를 사냥하며 뛰어놀던 나는 로그아웃하는 순간 입 하나 제대로 뻥긋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전락하니까.


그런 의미로 스페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핑계라면 핑계랄 수 있겠지만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어를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언어는 공부한다고 빨리 느는 것도 아니고 장기적인 노출과 노력이 필요한데.. 솔직히 8시간의 근무, 그 후 이어지는 3-4시간의 육아와 집안일 끝에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나 의지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래도 스페인 버전의 나를 레벨업 시키려면 어떻게든 굴리긴 굴려야겠지. 무식하게 스페인어 사전의 광산에 가서 단어를 광물 캐듯 외우더라도.


그런 의미로 내 내년의 계획 중 하나는 스페인에 있는 동안 레벨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거다. 그러면 이 가상현실 같은 괴리감도 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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