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시집살이

이제야 첫 페이지

by 민토리


정확히 따지자면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집의 소유는 남편과 나니까.

다만, 이 집은 스페인에 자주 올 일이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시부모님이 별장 같은 용도로 더 자주 사용하고 계신다. 도시의 한 복판에 있는 본가보다 한적한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한 별장이 훨씬 편하다는 이유로 사실 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많으시긴 하지만.


그 덕에 스페인에 갈 때마다 묘하게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닌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어차피 길어야 2주에서 한 달 머무는데 그런 것쯤은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머무르시면 집이 비는 것보다야 관리도 잘 되니 다행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에 대략 일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머물 예정으로 오다 보니 좀 상황이 애매하게 되었다. 시부모님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아예 별장으로 이사 오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연세도 있으시니 차라리 건강 쪽으로 생각하자면 나은 결정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아이들을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는 가족이 없어서 아이들이 그런 걸 조금 부러워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스페인에 도착하면서부터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동거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그제야 몰려왔달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다지 가족적인 인간은 되지 못한다.


한국의 가족들은 아끼고 챙겨주는 호호 하하 분위기는 아니고, 도리어 가부장적 유교 관습이 뿌리 박힌 곳이라 한국에서 가족들과 살 때도 그 강압적이고 통제받는 기분을 견디지 못해 밖으로 떠돌았다. 오랜 기간 나와 있었던 까닭에 이제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도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한다지만, 그래 봤자 한 달에 한번 연락을 할까 말까 하니까.


그 뒤 영국에 나온 뒤부터는 혼자 살거나 누군가와 같이 살더라도 사적 영역을 보장받으며 지냈기에, 한국에 있을 때와 달리 그나마 집을 '내 공간'이라고 인정하며 살 수 있었다.


그랬는데.. 또다시 누군가와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나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말도 잘 안 통하고, 무엇보다 완전한 남이 아닌 시부모님과..


참고로 말하자면 남편과 나는 둘 다 비슷한 시기에 가족을 떠나 해외 생활을 했고, 둘 다 가족들에게 '까만 양 - Black sheep'같은 존재라서 가족들과의 연계점이 약하다. 더군다나 둘 다 타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이 이어지는' 결혼이라기보다 정말 '개인이 이어지는' 결혼 생활을 해왔다. 즉, 네 가족은 네가 알아서 챙기고, 내 가족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딱 그 정도로.

예를 들어, 시어머니의 생신 이어도 내 역할은 남편이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고, 내 어머니의 생일도 '오늘 우리 엄마 생신', 그러면, 남편이 '어, 그래? 전화드렸어?' 딱 그 정도랄까. 애써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 한국어를 구사하며 상대방의 가족과 통화하려는 시도 따윈 없고, 서로에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남편과 여러 번 얘길 하긴 했었다. 스페인에 가더라도, 네 부모님이 거기 계신다 하더라도 지금 내 일상이 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 알아서 잘 설명해두라고.


그렇게 어떻게 보면 '막돼먹은' 개인주의에 찌든 며느리가 될 각오를 하고 오긴 왔는데.. 아직도 적응이 좀 어렵다.


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려운 건지는 아마도 차차 이야기를 하겠지만.. 현재 가장 불편한 건 이 집이 도저히 '내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집이 작으냐 하면 그건 아닌데, 3층 건물에서 2층 전체는 시부모님, 3층 전체는 우리가 쓰고 있기 때문에 일단 올라가 있으면 그다지 문제 될 건 없다. 대신 1층에 거실, 주방,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방이 있는데.. 문제는 내가 여길 내려가지 않으려 한다는데 있다.


어학연수할 때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살면서, 말도 어색한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나, 대화를 할 기분은 아닌데 어떻게 사소하지만 무례해 보이지 않게 인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 가지고 올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던 것처럼. 영어 공부고 뭐고 간에 그냥 좀 쉬고 싶은데 괜히 내려갔다가 나한테 말 시키면 어쩌지, 그런 생각에 아예 그럴 일 자체가 생기지 않게 방에 처박혔던 것처럼.


지금의 내가 딱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내가 한번 보고 헤어지면 끝인 호스트 패밀리와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내 원래 성격이 좀 사근사근하고 붙임성 있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난 집 안에서와 집 밖에서의 성격도 꽤 다른 편이니까.


그러다 보니 단기간이라면 나도 꽤 사교성 있는 며느리 흉내를 낼 자신이 있지만, 매일을 그렇게 유지하려면 소모해야 할 에너지가 너무 크다. 그래서 자꾸 충전시키려고 3층에서 짱 박히게 된다.


이런 내가 시부모님 눈에 그리 좋아 보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은근히 남편을 통해 압력을 넣으신다는 것도. 남편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되나.




왠지 이제야 그동안 휙 하고 넘겨 버렸던 국제결혼 이야기의 한 챕터를 다시 열어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야 고작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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