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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an 31. 2021

너와 나의 입장 차이

이런 팀원과 덩달아 수렁으로 끌어 들어가는 우리. 

11월 말에 새로 팀원이 한 명 들어왔다. 보통 팀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나 같은 경우 일주일 안에 그 사람과 일대일 면담을 잡으려고 하는데, 하필 그때 12월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어차피 그 팀원 A의 직계 상사는 내가 아니기에 그 직계 상사인 V에게 초기 교육을 전담시키고 난 V에게만 바로 보고를 받기로 결정한 뒤 A는 첫 출근을 했다. 

초반에 IT 시스템 접속 때문에 문제가 좀 있긴 했지만  A는 제대로 정부 통신망에 접속했고, 업무에 관한 초기 교육 자료는 다 지급되었다고 보고 받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일단 내버려 두었다. 내 매일 일정이 30분의 시간도 허락하지 못할 정도로 꽉 차 있었던 것도 있지만, V는 노련한 팀장이었고 이미 여러 명의 신입사원을 교육시킨 경험이 있기에 믿은 것도 있었고. 


그런데 한 2주 정도 되었을까, 자꾸 이상한 곳에서 이메일이 날아들어 오는 거다. 예를 들면, 갑자기 인사과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팀, 혹은 다른 부서에서 연락이 온다던지. 예상하지 못했던 메일들이 쏟아지길래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어 읽다가, 읽을수록 황당해져 왔다.


내용을 보고 유추해보니, A에게 업무 파악을 하라고 자료들을 줬더니 A는 그걸 읽으면서 스스로 업무를 익히거나 사수나 다른 팀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거기 나와있는 업무 담당자들에게 무턱대고 연락부터 돌리기 시작한 거다. 


내가 맡는 부서는 업무의 성격상 정부 기관의 여러 곳과 연결되어 있는데, 부서의 이름을 걸고 "저 ㅇㅇ부서 새로운 신입 사원 A인데, 부서 자료 중 XX를 읽다가 연락을 드립니다" 하고 연락을 하니, 상대방은 당연히 부서 차원에서 연락이 오는 건 줄 알고 미팅에 응했다. 그런데 막상 미팅을 하고 보니 도대체 왜 A가 자신에게 연락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상대방은 A에게 답을 하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부서 책임자인 나를 참조란 (cc)에 넣으면서 '이게 뭐냐' 혹은 '너 이거 알고 있냐/네가 지시했냐'라는 간접적 의문을 표현하기 시작한 거고.


상황을 파악한 뒤 바로 V에게 면담 요청을 해서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V 역시 당황하며 자기도 뭔지 모르겠다며 곤혹스러워하는 거다. 자기가 A에게 내린 지시는 이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까지 일이 꼬인 건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내게 돌아온 이메일들 중 사소한 건 문서 내용 확인 정도였지만, 심한 건 부서의 일 전체를 혼란시키는 것들도 있었다. 솔직히 그때도 조금 황당을 넘어 열이 받긴 했지만, 그래도 신입사원의 과한 열정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다. 바로 A와 일정을 잡아서 원래 30분으로 잡혀있던 면담이 3시간으로 늘어날 때까지도 최선을 다해 A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썼고, V와도 함께 의논해서 연락 체계를 다시 상기시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휴가 전에 V는 A를 Line management 하는 게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아무리 말을 해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일을 처리하며 그러면서 꼭, "But my line manager, V, confirmed this" (내 직속 상사 V가 확인한 사항이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팔아넘긴다는 것. 그러면서 그 잘못을 지적하면 금방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난 네가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다" 하며 모든 책임 전가를 상대방에게 넘긴다고 했다. 


사실 그런 낌새는 나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A는 굳이 비유하자면 '여기서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해' 하고 명령을 내리면 앞에서는 얌전히 알겠다고 하고선, 자기를 보는 눈이 사라지자마자 온갖 곳을 헤집고 다니며 가는 곳곳마다 불을 놓고 사라지는 그런 말썽꾸러기 만렙 같은 존재인 거다. 


그러다가 진짜 불이 나면,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야"하며 발뺌하거나 "이건 네가 나더러 어디까지 가지 말라고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혹은 "불을 피우면 안 된다고 제대로 경고 표시를 해놓지도 않았잖아. 그래선 난 불을 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이건 내 탓이 아니라 경고를 제대로 해놓지 않은 그쪽 탓이야" 하는 식이다. 


하아... 정말 입에서 가끔 &$$%&*((%#$ 같은 말들이 후드득 떨어지려 했지만 그래도 아주 참을 인자를 몇 번이고 써가며 참았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전에 또 한차례 있었던 채용 공고로 팀장 L이 내 부서로 발령받아 오게 되었다. 우린 새해부터 소속 정부기관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한 축을 담당해야 했기에 난 L을 책임자로 명하고 L에게 A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책임져야 할 팀원이 여럿인 V보다 L에게는 아직 팀원이 없으니 A를 맡겨두면 A의 '우발적/자발적 방화'도 좀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 취한 조치였다. 그리고 예상이 맞았는지 새해 초반에 A는 좀 얌전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영국에서 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악화로 학교가 다 문을 닫고 온라인 수업으로 돌려지면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일 패턴이 또 한 번 휘청거렸다.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L 역시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난 L과 면담을 통해 L의 근무 패턴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고, 대신 A가 혼자 또 돌아다니지 않도록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미리 내리기로 했다. 


1월은 아주 미치도록 바쁘게 흘러갔고 프로젝트에 가해지는 압력도 커져갔기에 A에게는 첫 임무로 기획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주어졌는데... 


마감 하루를 남겨놓고 A은 내게 전화를 해서 보고서 양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메일에 조목조목 설명까지 다 해놓은 데다가 이미 보고서의 취지와 내용에 대한 것까지 L과 A에게 미팅을 통해 다 전달했고, 참고 자료들도 다 나와 있는데, 마감 하루를 앞두고 보고서 양식을 탓하기 시작한 거다. 


그걸 다시 하나하나 설명해주느라 난 점심시간이고 뭐고 다 말아먹고 그 덕에 조금의 휴식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회의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래도 L이 없으니 불안해서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랬는데... 저번 주 그걸 읽고 나서 아주 정신이 혼미해지는 줄 알았다... 당장 프로젝트 일정에 따른 마감이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그 막판에 기껏 했답시고 내민 보고서는 보고서의 '보'자를 붙이는 것조차 미안할 수준의 문서였기 때문이다. 


만약 A가 내 대학 때 학생이었다면 당장 10점도 아까운 건 물론 Plagiarism (표절)으로 학부 위원회에 보고를 올리고 싶을 만큼. 대학에 있으면서 한 학기당 거의 200개에 가까운 과제를 채점했지만 그때 봤던 'lowest score'를 주욱 끌어내리며 갱신하는 수준. 


그 보고서를 아침 8시에 보고 내 표정이 아주 구겨졌고, L는 그런 내 표정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처럼 출근하자마자 내게 사내 채팅 망을 통해 연락해왔다. 당장 사과부터 하면서. 


그래도 그건 L의 잘못이 아니고, A 역시 이런 일이 처음이면 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피드백을 해주고 마감일을 늦춘 뒤 다시 기회를 줬다. 


그런데 또 오후에 전화가 와서는 보고서 양식을 탓하더니 왜 자기가 제출한 게 문제인지 설명을 해달라는 거다. 그래서 다시 차근차근 피드백을 해줬더니 그럼 문서 처음부터 짚어가며 어떤 문장을 넣고 빼라는 건지 알려달란다. 


내가 진짜. 


여기서는 정말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내가 너한테 문장 하나하나 어떻게 바꿔야 할지 설명해줄 거였으면 내가 하고 말지 그걸 너에게 맡겼겠냐고, 그럴 거면 네가 배우는 게 뭐냐고, 머릿속으로 거친 말 반, 당장 전화를 끊고 싶은 충동이 반의 반, 당장 여기서 손 떼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반의 반의 반 정도로 혼란스럽게 엉켰지만 그래도 참았다. 가능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피드백을 해줬으니 다시 네 생각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올리라고 말했다. 보고서 양식이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럼 네가 생각하는 데로 따로 서식을 잡아도 상관없다고 친절히 덧붙이면서. 


그렇게 전화를 끊었더니, 또 하라는 수정은 안 하고 보고서 양식 탓을 하고, 내가 새로운 보고서 양식을 쓰라고 한 게 자신한테 혼란을 줬다느니, 자기는 아직도 보고서가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느니 그런 막말(!)을 던져대기 시작하는 거다.  


A가 그 난리를 피우는 걸 보는데 아주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A는 몸이 안 좋다며 병가를 쓰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직속 상사인 L도, 그 직속 상사인 나도 아닌 V에게. 


보고서와 관련된 사실을 모르는 V는 기관 내 병가 조치 지침에 따라 내게 바로 연락해서 그 사실을 알리며 A가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아주 스트레스받고 있다고 울먹이며 호소했다고 했다. 자기는 몸이 너무 안 좋은데 L이 오늘까지 보고서를 마감해서 올리라고 했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 말을 듣고 V에게 A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요약해서 내게 보내라고 부탁한 뒤 난 바로 인사과에 연락했다. 


.... 


영국 공무원 기관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무조건 인사과 (HR)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런 상황에서 A가 Management으로부터 괴롭힘 (bullying and harrassment)을 당했고, 그로 인해 mental stress를 받아서 일을 할 수 없다고 모든 책임을 management 쪽에 전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제대로 된 증거 제출을 못하면 도리어 뭇매를 맞는 건 이쪽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인사과의 조언을 얻는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여기에 얽힌 사람들은 모두 아주 길고 고달픈 여정에 시달리게 된다. 진짜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증거 확보를 위한 일을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우린 이제 그 한숨 나오는 도입부에 서있을 뿐이고.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수렁을 앞에 대하니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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