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 어렵니?
영국 정부 기관에는 다섯 개의 Government Professional Bodies가 있다. 다섯 개의 전문분야 그룹, 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려나? (한국 공무원 제도에도 이런 게 있나요?).
Government Economic Service (GES)
Government Geography Profession (GGP)
Government Operational Research Service (GORS)
Government Social Research (GSR)
Government Statistician Group (GSG)
일반적으로 영국에서는 공무원이 되려면 시험을 볼 필요는 없다. 대신 공무원이 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고 실제로 낮은 직급은 진입 장벽도 그다지 높진 않다. 다만 자동 승진이라거나 주기적인 자리 이동 이런 건 거의 없다. 직급을 올리려면 다시 원하는 자리에 지원서를 넣어서 똑같이 경쟁해야 하고, 이건 조직 내에서 다른 자리로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나마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인사이동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니까 일단 넘어가고.
어쨌건 영국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드는 자리에 공고가 떴을 때 입사 지원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있고, 공무원은 되고 싶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을 때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저 전문분야를 통한 채용이다.
각 전문분야마다 지원 조건이 다르긴 한데, 대부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취준생들이 자기 전공과 관련해서 전문분야에서 따로 여는 채용공고를 통해 지원할 수 있다. 입사지원을 한 뒤 보통 서류 심사, 면접, (분야 따라 필기시험을 치는 곳도 있다) 등의 절차를 걸친 뒤 합격하면, 전문분야 그룹의 멤버들이 자기가 속한 공무원 조직에 비어있는 자리를 소개해서 채용되는 그런 구조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전문분야 그룹에 속하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정부기관 사람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많아지게 되니, 해당 전문 분야와 관련된 학위가 있으면 일단은 들어가는 게 좋다 (뒤늦게 가입도 가능한데 대신 자격조건이 맞아야 하고, 내부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다섯 개의 그룹 중 두 개의 그룹에 동시에 속해있는데, 이번에 그중 한 그룹에서 주최한 Training Course에 이틀간 참가하게 되었다. 정부 기관 전체를 통틀어 총 12명의 참가자만 받았기 때문에 나름 경쟁을 뚫고 들어간 건데..
여기서 바로 그 사달이 났다.
시작은 코스가 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3일 전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코스가 시작되기 3일 전 내 인박스에 도착한 메일 하나. 지금 정부기관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 프로젝트 진행 담당자가 프로젝트를 후원 중인 장관들 중 한 명이 V 프로젝트를 궁금해한다며 그 프로젝트 담당자인 나를 호출한 거였다. 장관 지시라는데 어쩔 것인가. 상관의 말에 행동이 빨라지는 공무원 조직답게 순식간에 미팅이 잡혔다.
그런데 그 미팅 날짜와 시간이 내 코스 시작 시간과 겹치는 거였다. 코스는 온라인 상으로 10시부터 5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고, 그 미팅은 10시 시작. 미친 척하고 나 코스 있으니 못해, 하고 배를 쨀까, 어쩔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위에서 계속 '그 회의에 너 참석하는 거 확실하지?'하고 쪼아대는 바람에 'accept' 버튼을 날렸다.
그래도 나름 회의시간은 30분으로 잡혀있었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코스 주최자들에게 30분 늦게 접속하겠다, 하고 미안하다는 메일을 미리 보냈다.
코스 시작 하루 전.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회의 중이라 받지 못하고 음성메시지를 확인하니 주최자 중 한 명인 M이었다. 그런데 음성메시지를 남길 때도, 내가 다시 전화했을 때도 아주 자연스레 내 성(surname)을 이름처럼 부르길래 친절하게 정정해줬다.
X is my surname, and my name is YZ.
쉬운 발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천천히, 또박또박. 그리고 상냥하게.
내 상냥함에 'oh'하고 한마디로 반응한 M은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다짜고짜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30분이나 늦는 게 말이 되냐고. 이럴 거였으면 왜 지원했냐, 도대체 무슨 대단한 사정이길래 거절도 못한 거냐, 참여할 마음이 있긴 하냐 어쩌냐.
처음에는 그래, 미안하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30분을 놓치게 된 게 아쉽긴 하지만 바로 접속할 거다, 등등 그렇게 순순히 내 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끝낼 생각을 안 하는 거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쳐서 사실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사람이 뭘 믿고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그것도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이렇게 무례하게?
그래서 마지막에 그 사람을 잠시 붙잡았다. 당장 'What's wrong with you?'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간 영국인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갈고닦은 예의 바르고 점잖은 내 이중인격이 일단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난 일단 그 사람을 놓아줬다. 입맛이 아주 쓰긴 했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그 사람도 신경이 예민했을 수 있지 하고 나름 합리화를 시키며 넘어가려 했다.
코스 당일.
30분의 긴장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온라인 코스로 접속했다. 열심히 자료를 읽고 토론에도 잘 참여했다. 그런데 자꾸 뭔가 틱틱 걸렸다.
바로 그 주최자 M이 자꾸 날 내 성으로 부르는 거다. 그래서 중간에 의견을 말하며 일부러 "Hi, this is YZ"하고 이름을 상기시켜줬는데, 그 뒤 YZ는커녕 이름 두 글자 중 앞자만 똑 떼어내서 이상하게 변형시킨 A로 부르는 거다.
그래, 그래도 이해하려고 했다. 내 이름 두 글자는 붙어있지 않고 한 글자씩 떼어져서 표기되니 Y가 내 이름 (given name)이고 Z이 중간 이름 (middle name)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날 Y라고 부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발음이 어려우니 Y와 발음이 근접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넘어가려고도 했다.
코스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다음날에는 조별 활동이 많기 때문에 M은 조별로 메일을 따로 보냈으니 확인하라고 했다.
메일을 열었는데, 바로 'Hello C, P and A'이란 첫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 이름이 없길래 누락된 건가, 하고 메일 수신자와 이름을 대조했는데, 주최자 2명을 제외하면 아무리 봐도 C, P 그리고 나 밖에 없는 거다.
그걸 확인하자 참았던 화가 치솟기 시작했다. 보통 자신의 이름이 메일 주소가 되는 걸 생각하면 딱 적혀 있지 않는가!!! 그리고 수신자에도 적혀있지 않는가! 모든 정부기관의 표기가 그러하듯 성, 이름 이렇게!
'X, YZ (y.z.x@.... gov.uk)' 하고!!
그런데 눈이 삐었나, 어떻게 A가 튀어나오냔 말이다. 내가 'my name is YZ, but you can call me A'라고 허락한 적도 없는데!!!
아주 열이 받았지만, 그래도 아주 공손하게 (이 정도면 정말 성격이 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답을 보내며 Y Z라고 정정해줬다. 물론 M으로부터 더 이상의 답은 없었지만! (보통 그러면 웬만한 사람들은 아무리 형식적이라도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내는데!)
코스 둘째 날. 아침에 접속했는데 여전히 조별 접속 링크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메일을 날렸더니 한참 있다가 메일에 문제가 있었다며 접속 링크가 담긴 메일이 날아왔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링크가 작동되는 지 확인부터하고 조별 활동 준비를 하고 있는데 또 M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날 A라고 부른 M은 또 다짜고짜 메일을 받았냐고 물었다. 그래서 상냥한 목소리로 받았다고, 고맙다고 말하자, 이 인간이 대뜸 한숨을 내쉬는 거다. 그것도 짜증이 가득 담긴 한숨을!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I asked you to send me a confirmation mail".
내가 웬만했으면 그래, 내가 6개의 링크가 길게 이어진 메일의 제일 끝에 있는 문장 하나를 보지 못했다, 조별 활동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랬다, 내가 메일 못 받았을까 봐 걱정이 많았구나, 정말 미안하다, 그러고 넘어갔을 텐데, 이쯤 되니 아주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니 너 나한테 왜 이래?
M은 진짜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OK, fine"하고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화면으로 돌아와 정보를 읽고 있는데, 부글부글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새끼가!
바로 M의 메일에 'reply' 버튼을 눌렀다. 빠르게 아주 거친 말들이 화면에 찍혔다. 그랬다가 이게 내 무덤 파는 일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이런 개소리는 차라리 전화로 하는 게 증거가 안 남으니까.
그런데 M이 전화를 안 받는다. 10번 가까이 버튼을 눌렀다가 끊었다.
같이 재택근무하던 남편이 내 울분에 찬 고함소리를 듣고 위층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한번 소리로 터져 나오자 예의 바른 나는 사라지고 대신, 당하고는 못 사는 핏발 서린 내가 나타났다. 남편은 내 말에 진정하라며, 나중에 정식으로 complain 하라고 말했지만, 그게 더 열 받았다.
저런 인간은 그냥 지 내키는 데로 싸지르고 지 갈 길 가고 있는데, 그 똥을 맞으면서도 이성을 유지하며 고상한 분쟁 해결법을 제시해야 하는 건 나니까! 똥물을 끼얹은 건 저 인간인데 왜 정작 난 그 원인이 혹시 나에게 있는 게 아니냐고 - '내 이름이 어려워서, 내가 영국인이 아니라서, 내 이름이 영어 이름이 아니라서, 내가 이방인이라서' - 고민해야 하냐고!!!
....
정말 오래간만에 20분 정도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한번 생각하니 그동안 쌓아둔 게 다 터져서...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골목에 서 있던 10살 남짓한 백인 남자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쳐들며 내게 소릴 질렀다.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 미친놈이, 하고 지나쳤는데 그 어린 놈이 뒤에서 들고 있던 우유통을 차에 집어던졌다.
내가 백미러로 미쳤냐고 손짓을 하자, 더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욕하더라.
또 얼마 전에는 근처 이웃집에 나무를 손질하러 왔던 사람이 우리 집 정원의 우람한 나무들을 보고 정리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이웃집에 온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일을 맡겼는데, 남자 셋이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는 갑자기 원래와 다른 값을 불렀다. 그것도 100파운드 이상 뻥튀기된 가격을.
뭔 개소린가 싶어 그럴 거면 안 한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잘못 안거 같다며 미안하다고 원래 가격으로 해준단다.
그런데 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를 어설프게 잘라놓더니 시간이 늦었다며 주말에 다시 온다는 거다. 대신 금액의 반은 달라고 하면서. 찝찝했지만 그래, 알았다, 하고는 일단 반을 지급했다.
그런데 주말이 찾아와도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전화도 쌩까고, 문자도 쌩까고. 나중에는 아예 연락을 차단한 것 같다. 내가 억울하다고 고소를 하든 뭘 하든 방법을 찾겠다고 하자 남편이 말렸다. 어차피 우리가 어디 사는 지도 아는데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냐고.
그래. 맞는 말이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액땜했다고 넘어가려고 해도 그런 게 쌓여있었던 거 같다.
그런 것들에 비교하면 이름 하나 잘못 부르는 건 애교일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생각하면 이름 하나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말도 되지만.
하하하. 또 이렇게 웃고 아닌 척 넘어가야 하나. 모르겠다. 이 타지 생활은 어쩌면 내가 완전히 적응하는 게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자꾸 이렇게 알려주는 거겠지.
너 영국인 아니야. 착각하지 마. 이방인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