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Sep 08. 2020

가면 증후군, 당신을 의심하는 목소리

그런데도 무시하기 힘든 목소리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과정 2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First Year Report (박사 과정 1년 차 마지막 때 Introduction, literaturea review, research methodology - 박사 최종 논문의 반쯤 되는 분량 - 을 써서 제출해야 하는 데, 이걸로 박사 과정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심사를 받는다. 이 보고서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수정본을 다시 제출할 기회가 주어지거나, 아니면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대신 석사만 받고 나가라, 하는 극단의 통보를 받게 된다;;)를 제출하느라 멘털이 탈탈 털린 다음, 합격의 기쁨도 잠시 연구 방법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나는 아주 바닥을 박박 긁고 있었다.


그때 지도교수의 소개로 멘토링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앞길이 더 보이지 않는다, 내 한계는 여기인 게 아닐까 싶어 두렵다, 내 멍청함이 이제야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다들 나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어쩌다 케임브리지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등등, 우울함이 극에 달해서 그런지, 뭐 그런 온갖 지질한 이야기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


그때 내 이야기를 침착하게 다 들어주시던 그 멘토분이 마지막에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You should trust yourself more. And the Cambridge admission office doesn’t make that many makes”

(넌 너 자신을 좀 더 믿어야 해. 그리고 케임브리지 입학전형실이 그렇게 많은 실수를 하진 않거든)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두 단어를 들었다. Imposter Syndrome (가면 증후군)


A psychological pattern in which an individual doubts their accomplishments or talents and has a persistent internalised fear of being exposed as a ‘fraud’ (Wikipedia)
높은 성취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똑똑하거나 유능하거나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남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 (newspeppermint)


지난주에는 지금 있는 정부기관에서 대대로 행하고 있는 Mental wellbeing 행사의 일환으로 이 증후군에 대한 세미나가 제공되기에 다시 참여해서 들었었다.


이 증후군은 보통 여성, 학계, 소수집단, 창의력이 요구되는 일을 하는 사람 등등이 가장 겪기 쉬운 증상이라고 했는데, 들으면서 뭐랄까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나란 인간 참 종합세트구나, 싶어서..


생각해보면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진학한 뒤, 컨설팅 회사와 학계에서 일하는 동안, 가면 증후군은 우울증과 함께 단짝처럼 내 집에 종종 놀러 왔던 녀석이었다 (뭐 지금도 오긴 하지만..). 혼자 올 때도 있었지만, 이 녀석은 시샘이 많은지 꼭 내가 우울증 녀석과 함께 있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그 면상을 들이밀곤 했다.


예를 들면, 하던 일이 제대로 안 풀릴 때, 무시와 차별을 당했을 때, 지원했던 곳에서 떨어졌을 때, 연구 기획서가 까였을 때 등등..


우울증 녀석이 ‘그래, 다 힘들지? 다 거지 같지? 이보다 더 끝이 있을 수 있나 싶지,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있는 거야’ 하면서 한껏 낮아진 내 자존감의 등을 밟고 있을 때, 가면 증후군 이 녀석은 마치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한술 더 떠서는, 아예 손톱을 세우고, ‘그러게 내가 뭐랬어, 여기까지 온 게 용하다고 했지! 지금까지 버틴 게 진짜 운 좋았던 거였다고 얘기했지! 다른 애들 봐봐, 여기서 네가 제일 못 나가! 조만간 다 들통난다고!’ 하며 생채기란 생채기는 있는 데로 내는 거다.  


그런데 사실 이건 이 녀석의 주특기가 아니다. 이 녀석의 잔인하면서도 교활한 주특기는 바로 내가 잘하고 있을 때, 뭔가를 많이 이룰수록 툭툭 튀어나와 던지는 불안과 자기 의심의 씨앗이다.  


‘진짜 이게 너만의 노력, 힘으로 얻은 걸까?’


그렇게 심어진 불안의 씨앗은 일단 내 성공 파티에 찬물을 끼얹고, 나중에 우울증 녀석을 만나거나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이 때다 싶어 성장해서는 내 앞에 거대하게 나타나서 웃어댄다. 


‘거봐, 내가 뭐랬어? 네 까짓 게 뭐. 그때 네 성공은 운이었다니까’


.... 재수 없는 녀석.


그런데도 이 녀석과 손절하는 게 쉽지가 않다. 아니 가끔은 이게 이 녀석이 하는 말인지 내가 하는 말인지 헷갈릴 때도 있으니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에 또 이 녀석이 찾아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대외적으로 다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크게 보면 사소한 일인데, 그 하나가 결국 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면서 틀어졌을 때, 바로 그 생각이 든 거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게.. '


웃긴 건 이 녀석과 동고동락했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이 녀석의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었다는 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번에는 우울증 녀석도 끌고 오겠지. 그리고 얼씨구나 내 집 안에서 축제를 벌일 거다. 나를 질근질근 밟으면서.. 


Imposter Syndrome (가면 증후군)에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인터넷을 찾아보면 아주 많을 테니 좀 더 전문적인 조언을 구하시는 분들은 그걸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고, 여기서는 아주 개인적인 대처법을 공유해 보고 싶다.  


일단 이 녀석의 목소리부터 구분하는 연습을 한다. 이 녀석이 하는 말에는 대충 공통점이 있다. 일단 당신이 이루어 낸 모든 것을 조롱한다. 잘 모르겠으면 당신 주위에 당신이 잘되는 걸 못 보는 시샘 많은 친구인 척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승진했다는 소식이나 취업했다는 소식, 결혼한다는 소식 등등을 알렸을 때, 말만 축하한다고 하면서 꼭 '그런데..'하고 딴지 거는 그런 사람. 가면 증후군은 그런 사람이 당신 내부에서 속삭이는 말과 같다. 


목소리를 구분했으면 그 녀석이 언제 자주 출몰하는지 살펴본다. 내가 실패했을 때 나타나서 그간의 성공마저 다 뭉개 놓는지, 성공했을 때 나타나서 다른 사람에 비교하며 그건 별거 아니라고 찬물을 끼얹는지, 칭찬을 들었을 때 어떻게든 스스로를 깍아내리려고 나타나는지,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 전에 넌 그걸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지레 불안감을 조정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덜덜 떨게 만드는지, 그룹의 사람들과 있을 때 입을 닫게 만드는지, 등등. (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할 수도 있다;;) 


그 녀석이 언제 출몰하는지, 나타나서 무슨 말을 주로 하는지도 알아냈으면, 그다음 단계는 혼자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왜냐면 그 다음에는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 건지, 그리고 이 녀석을 만들어 내는 게 도대체 뭔지.. 이 녀석을 불러내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른데, 그게 가정환경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어떤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고, 가끔은 그냥 상황이 그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나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주위 사람들을 보니 나보다 학벌도 다 빵빵할 때, '나 같은 게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당연한 반응인 것처럼. 


분석의 다음 단계는 그 녀석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인데.. '인연 끊기'라고 부르지 않는 건, 그만큼 이걸 아주 없애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주 매몰차게 손절에 성공하신 분들은 비법 공유 좀;;). 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혹은 어, 그래,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갈길 간다, 그런 태도), 아니면 조목조목 따지기 (네가 하는 말은 모순이 아주 많아, 넌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는데, 내가 그 정도의 운을 타고 난 인간이라면 그것도 내가 가진 장점이잖아? 그리고 이 정도의 결과는 객관적으로도 꽤 괜찮은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입 닫아, 그런 말발), 혹은 외부 찬스 쓰기 (믿을 만한 친한 친구, 가족에게 긍정적 에너지 받기 - 너 잘하고 있어, 넌 진짜 괜찮은/굉장한 사람이야, 등등) 등.. 이것도 사람 나름이니 알아서 시도해보다가 효과 좋은 걸로 골라도 되고, 아니면 여러 개를 같이 써도 좋다. 




저는 지금도 이 녀석을 종종 대합니다. 직장 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전 정말로 가끔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예전에는 이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이것도 나려니,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내고 있답니다. 물론 이 녀석의 공격은 종종 막으면서 말이죠 하하;; 


이런 증후군 가지고 계신 분, 또 있으신가요? 어떻게 대처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이메일을 대하는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