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덕선이야!!
세 남매 중 둘째로 자랐다. 오빠가 있는 둘째라면 좋았을 텐데 언니가 있는 둘째였고, 남동생과는 9살이나 차이가 났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들일 거라고 굳게 믿었던 할머니는 태어나서 딸인 것을 아시고는 한동안 보려 하지도 않으셨다고 했다.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서 엄마의 삶은 무척 힘들었다고. 그게 언니와 나를 차별한 이유일까?
학구열이 높은 엄마는 언니에게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런 언니와 연년생이었던 나는 ‘덤’이었다.
언니가 아침에 전화영어수업을 하면 나도 일어나야 했다. 언니는 선생님과 전화로 수업을 하고, 나는 언니 옆에서 수화기너머에 들리지도 않는 선생님의 질문에 들리지도 않을 대답을 했다. 언니를 따라 뻐끔뻐끔.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언니의 수업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문제집과 참고서는 다 물려받았고 언니가 다 푼 학습지는 지우개로 지우고 풀었다.
다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첫째에게 투자를 많이 하고, 둘째는 따라 잘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게 당연했다고 한다.
언니가 나보다 공부할 것이 많고 입시가 1년 더 빠르다는 이유로, 나는 고3 때까지 집안 허드렛일과 심부름 담당이었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막내에 아들인 남동생은 나와는 또 다른 사랑과 귀여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였다. 언제부턴가 언니와 같이 놀고 있을 때조차도 일손이 부족한 엄마가 언니와 나를 같이 불러도 언니는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난 바빠.'
나는 엄마의 요리 조수였고 마트 진열구조도 꿰뚫고 있었다. 달리기도 잘해서 엄마가 급하게 필요한 식재료를 사 오라고 시켜도 물이 끓기 전에 사서 돌아왔다. 설거지, 화장실 청소, 빨래 널기, 그리고 남동생 천기저귀 접기의 달인이었다. 어른이 된 후 언니에게 불공평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했을 때 언니는 말했다.
"그건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도 별말 없이 한 네 잘못이지. 누가 잘 하래~"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엄마가 혼자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집안일을 만만했던 나에게 분담하면서도 칭찬을 하거나 나의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거다. 하루하루 사는 게 바쁘고 정신없어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테지만, 사실 내 감정에 대해서는 신경 쓸 생각조차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언젠가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의 서운함과 억울함을 말해보았지만, 엄마는 치과의사인 언니와 서울대 학사와 석박사를 스트레이트로 밟으며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남동생은 자라면서 엄마 속 한 번 안 썩인 자랑스러운 자식이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끝까지 내 감정은 신경 쓰지도 않았고 더 들으려 하지도 않으셨다.
내가 그렇게 공부를 못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 늘 전교 1,2등을 했던 언니와 남동생에 비하면, 반에서 5등 안에 겨우 들면서 친구들과 몰래 아이돌 콘서트에 가려다 들키기나 하는 나는 엄마 아빠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친구들의 부모님은 다 나를 예뻐하셨다. 콘서트에 보호자로 같이 가주신 친구네도 그렇고, 친구네 오빠에게 시집오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다. 내가 같이 한다고 하면 무조건 허락한다며 항상 나와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꽤나 예의 바르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착한 아이였지 부끄러워할 만한 딸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공부를 잘하고 못한다는 게 자식을 차별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하지 마 진짜. 내가 얘기했잖아! 언니랑 같이 안 한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왜 맨날 내 말은 안 듣는데? 내가 언니랑 생일 하기 싫다고 엄마랑 아빠한테 얘기했잖아!
작년에도 그랬잖아! 재작년에도! 왜 맨날 나한테만 그래? 내가 만만해?
난 뭐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야? 왜 나만 계란프라이 안 해줘?
내가 계란프라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맨날 나만 콩자반주구. 나도 콩자반 싫어하거든?
그리고 왜 노을이만 월드콘 사줘??
통닭도!! 아저씨가 나 먹으라고 준 건데, 닭다린 언니하고 노을이한테만 주고 나만 날개주구!!
나도 닭다리 먹을 줄 알거든??
왜!! 나만 덕선이야! 왜 나만 덕선이냐고!
언니는 보라고 얘는 노을인데 왜 나만 성덕선이야!
왜 내 이름만 덕선이냐고!!! 아악!!!!
- '응답하라 1988' 1화 중에서
모든 둘째들이 그러듯이 항상 양보하며 살아야 했다.
그래도 나의 이 숭고한 희생정신을 엄마 아빠만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쩌면 가족이 제일 모른다.
- '응답하라 1988' 1화 중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되었을 때 1화를 보다가 오열했다. 덕선이 엄마가 뒤늦게 덕선이의 마음을 알고 미안해한 것처럼, 덕선이 아빠가 몰래 뒤에서라도 덕선이를 챙겨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랬더라면 좀 달랐을까..? 덕선이는 부모에게 서러움을 터트렸고 부모로부터 사과와 인정을 받았지만, 난 자라면서 내 서러움을 한 번도 위로받지 못했다.
둘째는 원래 그런 거야
그런 적 없는데 왜 그러냐
그땐 다 그렇게 살았어
철이 들고 나서 '나 어릴 때 엄마가 그랬잖아.'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꺼내보인 내 마음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방어하는 대답들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내 상처받은 마음은 부모로부터 평생 이해받을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쭉 언니와 다른 대우를 받았다. 치대생인 언니는 과에서 회식을 하면 새벽 2시, 3시까지도 늦게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바쁜 언니를 안쓰러워하면서 아침마다 해장국을 챙겨주었다. 치과대학의 회식은 '필수 사회생활'이고 우리 과의 회식은 '쓸데없이 노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회식이 있어도 11시 전에 집에 들어와야만 했다. 치과대의 회식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생활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니가 늦었던 날들이 매번 과 회식 때문만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지지는 언니뿐 아니라 타인보다도 못했다. 가장 많이 비교가 된 건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언니의 친구이자 엄마 친구 딸이기도 한 S언니와의 평가였다.
학교에 국립대끼리 교류학생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내가 신청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서울에 헛바람이 들었다'며 '네가 서울대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고 서울대학생이 되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라며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후 언니 친구이자 엄마 친구 딸인 S언니가 교류학생을 신청해서 서울대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듣고는 'S는 너무 뛰어나서 이 대학교에 수강료를 내고 서울대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는데, 넌 같은 학교 다니면서 뭐 하는 거냐?'라고 다른 말을 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드셨다.
그 이후에도 내가 중국으로 다녀왔던 해외봉사활동은 '방학 때 공부나 하지 멀쩡한 돈 하늘에 뿌리러 다닌'일이었으면서, S언니가 한 같은 프로그램의 해외봉사활동은 '대한민국 대학생을 대표해서 러시아까지 봉사하러 다녀오는 멋진 활동'이 되었다.
내가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취직하겠다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절, 일주일 사이에 항공사도 은행도 다 최종에서 떨어져 무척 힘들었던(S그룹은 싸트에서 바로 탈락하기도 했었던) 시기쯤이었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던 나와 동갑인 K의 엄마를 만나 K가 그날 임원면접을 보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는 엄마는 'K는 우수해서 사장단들과 면접도 한단다.'는 말을 하며 취준생의 허파를 뒤집어 놓았다. 그날은 정말 '사장단들과 면접'이라는 이상한 단어에 너무너무 화가 났다. 평생 회사나 취업과는 담을 쌓고 살아 취업 과정도 모르면서, 정작 내 취직 준비는 관심도 없으면서 어쩌다 구박할 거리를 찾아와서 신난 사람 같았다. 딸의 상황을 알면 주변에 그런 얘기를 들어도 못 들은 척해주는 게 맞지않나? 내가 대체 사장단들과 면접이 뭐냐고 모르면 말을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 대단한 임원면접 엄마 딸도 지금 다 보러 다니는 거라고 소리 지르며 울자, '면접을 보면 뭐 하냐, 붙지를 않는데!'라며 더 큰소리로 야단치셨다.
남이 하면 대단해 보이고 내가 하면 못 미더운 것,
똑같은 상황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왜 늘 미운오리새끼였을까?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둘째 딸이어서일까, 학창 시절 공부도 못하는 아이돌 빠순이여서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또 다른 내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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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전문 상담을 받고 싶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제 괜찮아져서 글로 담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