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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을 해서 독립을 한 후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마침 타 도시에서 페이닥터를 하던 언니도 집에 내려와 있었다. 언니는 일찍 자야겠다며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서 말했다.
"나 예민해서 빛이 있으면 잠이 안 와"
마침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소설책을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이었고, 가서 방문을 닫아주고 잘 자라고 했다.
"문틈으로도 빛 들어와. 거실 불도 꺼"
언니가 말했다. 내가 고3 때 자려고 누워있을 때에도 같은 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한다고 밤새 헤드셋 끼고 대학 동기들과 대화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던 언니가. 내가 다음날 학교 시험이든 말든 같은 침대 옆에서 밤 12시가 넘도록 남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던 언니가.
나는 문 닫아줬으면 눈 감고 자면 되지 왜 거실의 불까지 꺼야 되냐고 되받아쳤다. 우리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안방에 있던 엄마가 나왔다.
"공부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뭘 지금 와서 책을 본다고 이 난리야?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책을 읽었으면 서울대를 갔겠네! 언니 자는데 방해된다니까 불 꺼!"
내가 보기엔 언니가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엄마는 역시나 언니 편을 들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그리 늦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공부 못 했으면 책도 못 봐? 지금 이게 날 혼낼 일이야?"
나는 너무 서러워서 읽던 책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서 집을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불 끄고 방에 들어가서 몰래 울었을 나였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독립해서 다행이고 갈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민도 없이 기차역으로 가서 바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고 올라가며 엉엉 울었다. 기차에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이 전화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올라간 서울엔 내 포근한 보금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마음은 진정되었고 회복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대우를 더이상 혼자 참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예전보다 빠르게 화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사람과 내 공간의 존재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다음날 아빠가 전화로 '엄마가 얘기하는 데 그렇게 나가버리는 불효자식이 어디 있냐'며 나를 야단쳤고, 그날의 반항은 결국 나의 사과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처음 시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 자리에서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결혼식날 보니 사돈댁에서는 언니를 더 중애 하시던데.."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내 표정을 보셨는지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뭘 그런 얘길 하세요. 하랑이는 우리가 더 예뻐해 주면 되죠."
하루만 눈여겨봐도 알아채는 정도인데, 부모님은 절대 언니와 편애를 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 언젠가 엄마가 내 남편에게도 내가 어린 시절의 일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기억한다며 모함(?)했지만, 자주 만나고 같이 지내다 보면 진실은 보일 수밖에 없다. 남편은 내가 부모님께 차별받고 자란 상처를 온전히 알고 이해한다.
둘째인 나 때문에 '둘째 사위'가 된 남편이지만 남편의 자존감은 너무나 건강하다. 그는 차별은 잘못이지만 내가 그걸 문제 삼아 대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차별을 인지하고 사과하실 분이셨으면 애초에 차별하시지를 않으셨을 테고, 그게 아니니 지금 내가 뭐라 하더라도 모르실 것이고 바뀌지 않으실 거라고. 그리고 내가 부모님한테 언성을 높이거나 불효한다면 그건 나쁜 줄 알면서도 하는 잘못이니 괜히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는 '언니와 남동생과는 차별하셨을지언정 그 힘든 시절 부족함 없이 잘 자라지 않았냐, 너를 잘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자식 된 도리로 효도해야 한다, 언니와 남동생과 비교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늘 잘해드려라. 나도 너를 낳고 키워주신 장인, 장모님께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며 내 모난 마음을 감싸 안아주었다.
지금도 엄마는 여전하시다. 내가 비행하면서 사 온 영양제와 선물들에는 시큰둥하시면서, 얼마 전 언니가 있는 미국에 다녀와서는 언니가 준 영양제는 너무 좋다며 입이 마르게 자랑하신다. 언니는 해외 살면서도 엄마를 생각하는 것이 지극하단다. 내가 비행 다니면서 사 오는 것과 비슷한 영양제들이다. 글루코사민 콘드로이친, 초록홍합, 달맞이꽃오일.. 등등
하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더 이상 내 서러움을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하지도 않고 차별 없는 사랑에 목마르지도 않다. 학문만이 삶의 전부였던 아빠, 그리고 삼 남매를 독박육아 할 수밖에 없었던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는 젊은 날이 삶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내 감정까지 살펴주기 힘드셨겠지. 더 장래가 촉망되는 언니와 남동생을 뒤치다꺼리하느라 평범한 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덜 쓰이는 존재였겠지. 이제는 그 시절 부모님을 조금 이해하려 한다.
아무도 남을 이해시킬 수 없다. 공자가 당신을 이해시켰는가?
당신이 공자를 이해한 것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대학원 진학에 중요한 과목의 시험이 있어 학점관리를 하느라 오지도 않은 '박 씨 가문의 삼대독자'인 남동생을 대신해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모신 것은 내 남편이다. 내가 손자가 아닌 손녀로 태어나서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손자도 첫 손녀도 아닌 둘째 손녀와 둘째 손녀사위만 함께 했다는 걸 할머니는 아실까?
엄마의 환갑도 아빠의 칠순도 호텔예약하고 친지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한 것도 내 남편이다. 아직 대학원생인 남동생과 미국에 살고 있는 언니 부부를 대신에 집안의 모든 크고 작은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내 남편인데 엄마 아빠는 늘 언니의 남편인 첫째 사위가 제일이고 언니와 남동생이 먼저다.
한 번은 '둘째 사위가 최고네.' 생색내며 장난으로 말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Y서방(나의 형부)이 미국에 있어서 그렇지.. 멀리서도 잘 챙기고 잘한다. 오고 싶어도 매번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 마음이 오죽하겠냐.."
생색을 내면 알아주는 사람은 따로 있나 보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렇겠지만 이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똑같은 자식이라도 마음이 더 갈 수 있겠지. 같은 마음이라도 표현이 다를 수도 있겠지.
혹시나 남편이 서운해할까 봐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남편이 말한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마. 우리가 부모님을 챙겨드릴 수 있는 상황인 게 얼마나 다행이야."
남편 말이 다 맞다. 애초에 누가 더 했니 누가 덜 했니 따지며 사는 것보다 좀 더 손해 보더라도 마음 편한 게 나은 나였다.
자라면서 누구에게도 1순위인 적이 없었는데, 남편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남편에게 늘 1순위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는 엄마가 늘 먼저야'라고 말하는, 내 핸드폰 저장명 그대로 남편 아닌 '내편'이기에 나는 더 이상 서럽지도 외롭지도 않다. 세상의 모든 복을 남편복으로 몰아서 받았나 보다.
그리고 아이들도.. 사춘기가 다가오는 첫째는 요즘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둘째도 매일 '엄마가 제일 좋아.'라고 속삭여준다. 덕분에 매일 충만한 사랑을 느끼며 산다.
나는 더 이상 애정결핍이 아니다.
내 모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전문 상담을 받고 싶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제 괜찮아져서 글로 담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