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에 잡아먹히지 않기
기분을 관리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단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이란, 대부분 외부 요인에 의해 변화되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돌려놓거나 끌어올리기 위해서 몇 배로 힘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저 어떤 단순한 메커니즘을 통해 도출되는 순간순간의 결과값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적되어 있던 피로와, 늘어난 업무를 정리하며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최근 3-4주 동안 감정 기복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관자놀이가 조이듯 하루 종일 아프고, 잠을 늦게 자는 것으로는 모자라 4시간이 조금 안되는 수면 시간 동안 6번 정도 깨는 날이 일주일에 2-3일은 되었다.
해가 짧아지면 유난히 상태가 가라앉아 왔던 터라, '그래 난 어쩔 수 없이 약간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인가 봐’라는 요상한 자기 연민을 발휘하려던 찰나, ‘근데, 최근에 물을 얼마나 마셨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내 생각이라고 하기엔 거의 누가 물어본 것처럼 단 한 번도 스스로 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는데 아마 오가며 듣고 있는 ‘슈퍼휴먼’ 같은 유튜브 채널에서 들었던 정보들이 무의식중에 짜깁기 된 것 같았다.
물을 충분히 마셨는지 물어보니 연달아 다음 체크리스트가 생성되었다.
수분이 평소보다 부족해지지 않았나?
양질의 탄수화물(현미, 통밀 등)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는가?
옷이 젖을 정도의 고강도 운동을 1시간 이상, 일주일에 이틀 이상 하고 있는가?
실내 환기를 충분히 하고 있는가?
나트륨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는가?
몸을 완전히 이완시키는 시간을 하루에 최소 10분 이상 갖고 있는가?
아주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데 사실 현대인 중 대다수가 제대로 지키지 못할 법한 질문들이었다. 한참 몸을 신경 쓸 때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던 것들이었는데, 요 근래에는 정말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 즉시 900ml 텀블러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 2시간 동안 홀짝홀짝 마셨다. 비상약으로 사두었던 진통제를 먹으려다, 일단 물만 마셔보자 하고 평소 마시던 양만큼 2리터 정도를 잠들기 전까지 천천히 마셨다. 잠들기 직전까지 얼얼하던 두통이 천천히 옅어졌고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13일 새벽 현재, 두통은 깨끗이 사라졌다.
디저트가 땅기면 차라리 현미밥 한 공기를 먹었다. 채수 스톡 넣어 끓인 물에 비건 만두 넉넉히 넣고 대파 한단 몽땅 썰어 넣어 만두국을 끓여서 밥 한 공기를 통째로 말아 먹었다. 부대끼지도 않고 충분히 배부르고 허튼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았다는 자부심도 함께 생기는 것 같았다. 마라탕과 떡볶이가 스멀스멀 떠오르길래 ‘생리 전이니까 한번 갈까’ 잠깐 흔들렸다가 그 대신 김치를 와구와구 먹었다. 배추김치 먹기 좋게 잘라서 두반장 한 큰 술 넣고 볶다가, 두부 한 모 주걱으로 대충 잘라가며 마파두부처럼 짜고 칼칼하게 만들었다. 밥이랑도 먹고 계란이 당기 길래 두 개 스크램블 해서 같이 먹기도 했다.
결제해놓은 콰트를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에 60분으로 설정하여 출근 전에 운동을 했다. 나름 운동한 기간이 좀 되어서 인지 무게가 없으면 숨이 잘 차지 않아서 원판을 추가하거나, 퇴근 후 저녁에 걷뛰를 한 시간 더 하기도 했다. 땀이 뻘뻘 나는 운동을 하고 나면 잊혀지는 것들이 많아서 좋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 미리 설치해두었던 방풍비닐을 열어 놓고, 보일러를 끄고, 거실 문을 열어 환기를 해놓고 출근을 하고 있다. 퇴근 후 차가운 방바닥을 만나게 되긴 하지만 ‘아으 추워’ 하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겨울 공기 냄새가 주는 상쾌함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런게 독립이구나.' 혼잣말이 나왔다. 나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 찾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 걱정 어린 챙김 덕에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을 필요 없었던 시간이, 나에게는 이제 종료된 것이다. 어떡하지!라고 했다가, 어쩔 수 없지 뭐.라고 대답했다. 씩씩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되지.
그리고 이렇게 내가 찾은 방법들을 알려주거나, 혹은 말하지 않아도 챙겨주는 관계가 생기면 그것을 ‘가족’이라고 부르게 되겠지. 왜인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든든하고,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