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비건, '큔'

생일을 함께 하는 곳

by 민트슈슈
SE-b90ed3a6-b178-4e50-833e-8e6c68f221c5.jpg?type=w966 비건 식당 '큔'의 오픈 주방

매년 생일 때마다 방문하는 식당이 있다. 2021년 8월 마지막 주와 9월 첫 주의 사이, 혼자서 고요히 보내는 생일의 적당한 쓸쓸함에 맛들려 어김없이 신라스테이 광화문점을 예약하고 숙소 근처 맛집을 찾아보다 우연히 알게 된 ‘큔’이다.


맛집을 찾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방문하는 동네를 네이버 지도로 연 후, 다짜고짜 먹고 싶은 메뉴를 검색해 보거나 원하는 키워드를 검색해 본다. 큔도 광화문 근방의 지도를 펼쳐 놓고 ‘비건’이라고 검색해서 나온 식당 중 하나였다. 북촌과 서촌 근처에는 비건 옵션이 있는 한식집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 큔은 메뉴도 그렇고 외관의 느낌이 독특하여 한눈에 가고 싶었다. 네이버 지도에 등록되어 있는 정보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는 브런치류의 음식을 판매하는 것 같았는데, 샌드위치와 커리, 수프 등의 메뉴와 바냐카우다, 우메보시, 낫또 등 이국적인 재료를 사용한 메뉴가 눈에 띄어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21년 9월의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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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첫 번째 방문. 비트, 그린빈, 주키니와 바냐카우다를 바른 샌드위치. 오늘의 수프를 추가하였다.

바냐카우다를 바른 제철 채소 샌드위치를 시켰다. 첫인상은 ‘엄청 납작하다’였다. 턱관절이 걱정되는 사이즈의 샌드위치에 익숙해있다가 큔의 샌드위치를 보니 볼륨감이 적고 간소하다고 느껴졌었다. 음식은 양으로 먹는 게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한 입 베어 물었고, 정확히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이곳에 계속 오게 될 것이라는걸.

21년 8월의 제철 채소는 비트와 그린 빈, 주키니였고, 퀴노아와 루콜라, 가지를 버무린 깔끔한 샐러드와 함께 나왔다. 바냐카우다에 대해서는 당시에 팔로 하던 인스타그래머 분의 레시피에서 이름만 본 적이 있는 상태였다. 꼬리 한 듯 구수한 향이 나면서 짭조름했는데 이 짭짤함이 과해지려나 싶을 때 비트와 주키니의 부드러운 채즙이 혀를 한번 감싸주었다. 혼자 있으면 맹숭맹숭한 그린 빈이 중간중간 톡톡 터지며 식감을 잡아주어 균형이 아주 좋은 레시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릴 자국이 꼼꼼하게 난 빵에서는 버터 향이 나고 씹을 때마다 바사삭, 페이스트리 같은 소리가 났다. 탬페와 낫또를 넣은 샌드위치도 있었는데, 포장이라도 해서 저녁에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왠지 이곳의 음식은 욕심을 부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내년 생일 주간에 또 오리라' 다짐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식당을 나섰다.


22년 8월의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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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생일에는 엄마와 함께 방문했다. 역시 바냐카우다를 바른 제철 채소 샌드위치를 시키고, 이번에는 발효 커리 한 접시를 추가했다. 디저트로 레몬 고수 아이스크림까지! 일 년 만에 먹는 바냐카우다는 기억보다 더 풍부한 맛이었다. 입안 전체 모든 벽(?)에 챡 하고 달라붙어 한 겹 한 겹 천천히 음미하게 되었다. 이날의 제철 채소는 애호박과 감자였고,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납작한 샌드위치 안에 포슬포슬하고 쫀쫀하게 잘 익은 채소들이 안겨있다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함께 곁들인 오늘의 수프는 토마토 수프였다. 사진에 보이는 어두운색 소스가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차갑게 낸 토마토 수프의 가뿐한 질감과 사뭇 놀라게 되는 짭짤함은 기억이 난다.

발효 커리는 비건 음식점에 한 번 이상 가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시판 카레보다 밀도는 가볍지만 색은 가득 찬 맛이었다. 카레 다운 향과 카레 다운 매콤함이 적절하였고 구워 올려 나온 다양한 채소는 어느 것 하나 오버 쿡 되거나 기름진 것 없이 마치 잘 데쳐진 나물처럼 선명한 색감과 맛을 가지고 있었다. 큔 인스타그램에서 신메뉴 소개 글을 보고 점찍어 두었던 레몬 고수 아이스크림은 그 질감이 젤라또처럼 쫀쫀해서 더 만족스러웠다. 눈이 절로 감기는 새콤함으로 시작하여 쫀득하게 입안에서 이리저리 놀다가 고수 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한 입에 갸우뚱, 두 입에 살짝 미소, 세 입에 오 맛있네?라고 말하게 된다.



23년 8월의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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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세 번째 방문. 홍감자와 애호박이 들어있는 바냐카우다 샌드위치, 낫또 버섯 샌드위치, 가지 수프와 발효 커리, 그리고 백향과(패션후르츠) 아이스크림.

올해는 동생과 방문했다. 작년과 똑같이 두 명이 방문했는데 왜인지 메뉴는 한 개를 더 시켰다. 2n-1의 법칙을 따랐을 뿐. 바냐카우다 제철 채소 샌드위치, 발효 커리, 그리고 매번 못 본체했던 낫또 버섯 샌드위치를 시켰다. 아 디저트도 두 개를 더.. 시켰다.

이번 제철 채소는 고운 자줏빛의 감자와 애호박이었다. 이빨로 빵을 끊어주기만 하면 부드럽게 익혀진 채소들이 절로 나타나 혀로 몇 번 굴려만 주어도 어느새 사라진다. 부드러운 음식은 가끔 이렇게 사람 애를 태운다. 버섯 낫또 샌드위치는 친숙함이 있는 맛이었다. 낫또의 미끄덩한 식감과 만가닥 버섯의 탱탱한 꼬들꼬들함이 어우러져 발랄한 느낌을 주었다. 부드럽게 퍼지는 감자와 애호박과는 달리 버섯과 낫또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통에 신경 쓰며 꼭꼭 씹어 먹었다. 오늘의 수프로 추가한 가지 냉스프는 직접 구현해 보고 싶을 만큼 내 스타일이었다. 풋풋한 생가지의 향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 올리브유의 향과 가지 특유의 맛이 섞여 마치 레몬 고수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봤을 때처럼 갸우뚱하며 한 입, 두 입 먹다가 그릇째 입에 가져가게 되는 맛이었다. 샌드위치를 두 개 시켜 수프도 두 개였는데 내가 다 먹었(마셨)다. 처음 시켜본 백향과 아이스크림이 참 좋았다. 일상에서 익숙한 과일이 아니다 보니 선뜻 맛이 떠오르지 않는 과일인데, 앞으로는 이 아이스크림의 맛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투명한 과육에 쌓인 씨앗이 톡톡 터지고 그때마다 눈을 찡그리게 되지만 그게 싫어서는 아닌 - 경쾌한 음식이었다.


간결하고 밀도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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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든 소스를 판매하는 쇼케이스와 가방을 보관할 수 있는 라탄 바구니.

배부르고 뜨뜻한 음식을 좋아하는 나에게 큔은 사실 반대 성향을 가진 음식을 선보이는 곳이다. 차갑게 내는 수프, 간결한 구성에 간소한 양. 맛은 한 음식 당 하나씩, 나머지 재료는 그 맛을 더 돋보이게 해줄 뿐 더 나서지 않는다. 음식의 간결함을 보조하는 듯, 그릇은 적당한 무게감과 질감이 있다. 매장 전체에 채도가 낮은 벽돌색과 호박색이 흐르고, 메뉴에 사용한 다양한 식재료를 판매한다. 큼직한 나무 테이블에 사람들이 함께 온 일행 단위로 띄엄띄엄 앉아있다. 의자 옆에는 넉넉한 사이즈의 라탄 바구니가 가방을 담는 용도로 느슨히 놓아져 있고 음악은 마냥 조용하지 만은 않다.


SE-b84429af-5f58-4b7a-a591-fe50e1f51431.jpg?type=w966 긴 원목 테이블

큔은 혼자 차려 먹을 때에는 영 실현하기 어려운 ‘적당한 양과 빈틈없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큔에서 식사를 한 후에는 다른 디저트가 곧바로 생각난다거나 하는 일 없이 다음 끼니 시간이 될 때까지 든든하고 차분히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다. 군더더기 없는 상태에서 멈춘다는 것, ‘딱 좋다’라는 기준을 갖는다는 건 이미 200%, 500%, 혹은 그 이상까지 갔다 와봤어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곳의 음식들이 딱 이렇다. 해봤고,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 절제와 균형미를 품고 있는 음식이 있다.


내년 생일에도 분명 방문을 할 것이다. 8, 9월의 제철 채소가 들어있는 바냐카우다 샌드위치를 시키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면 커리, 혹은 다른 샌드위치를 곁들일 것이다. 어쩌면 내년에는 아직 한 번도 안 먹어본 보리 곡물 커피를 테이크아웃하여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도 올해만큼의 날씨와 올해만큼의 맛을 볼 수 있기를. 나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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