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의 진짜 의미
그러다 청국장이 너무 먹고 싶었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 전 김치찜을 시켰던 가게 페이지에 들어가 ‘청국장 짜글이’ 메뉴를 담았다. 우삼겹 청국장으로 할까, 두부 청국장으로 할까 고민하다, 문득 냉장고에 청국장을 사두었던 것이 떠올랐다. ‘청국장찌개’를 직접 끓여 본 적은 없지만 본디 찌개란 물에 장을 풀어 끓이고 야채와 다른 재료들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넣어 맛이 배일 때까지 팔팔 끓여 내는 음식이 아닌가?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페이지에서 벗어나, 비마트로 넘어가 순두부와 우삼겹, 팽이버섯을 주문하니 묘하게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배달이 오는 동안 냉장고에 있던 애호박을 손질했다. 청국장 레시피를 몇 개 둘러보고 양념장도 미리 만들었다. 청국장, 다진 마늘, 고춧가루, 간장을 비율에 맞추어 섞으며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40분쯤 후 도착한 재료들을 모두 손질하고 가지고 있는 냄비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손질한 재료를 몽땅 때려 넣었다. 중불로 맞추고 10분, 20분, 파닥파닥 물 끓는 소리가 보골보골한 소리가 될 때까지, 수분이 적당히 날아가며 양념장이 고르게 베여 되직한 농도가 될 때까지 푸욱 끓였다. 온 집안에 뜨끈하고 구수한 냄새가 차올랐다. 얼려 놓은 밥 하나를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데워두고, 앉아서 먹을 자리를 여러 번 정리하고 닦으며 찌개를 기다렸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지만 알고 있는 맛이었다. 분명 초면인데 그리웠던 맛. 으깨지도록 푹 익은 애호박과 몽글몽글한 순두부, 꼬독한 팽이버섯과 따뜻하고 묵직한 국물에 순식간에 밥 하나를 말아 먹었다. 찌개를 먹기 시작하니 반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스타도 오픈 샌드위치도, 분명 접시 하나에 올려 먹고는 땡이었는데, 어찌 그때는 전혀 생각나지도 않던 반찬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목하고 큰 그릇에 담겨있는 찌개가 가운데에, 김치는 오른쪽, 나물은 그 옆에서 조금 위, 왼쪽에는 장조림이나 두부조림, 그리고 내 앞에는 밥이 놓여 있던 장면이 떠올라서 였는지도 모른다.
냉장고에는 양배추 한 통, 불려 놓지도 않은 병아리콩, 곧 싹이 날지도 모를 감자가 있었다. 양배추로는 예전에 종종 해먹었던 양배추 전과, 저속 노화 선생님 덕에 유행 중인 양배추 김 샐러드를 하기로 했다. 병아리콩은 후무스 말고 조림을 해보기로 하고, 감자로는 어릴 적 항상 먹던 감자나물을 해보기로 하였다. 제대로 된 레시피를 찾아보다가 행여 흥미가 확 식어질까 싶어 정말 대충, 내 입맛이 기억하는 정도로만 구현해 보자는 생각으로 바로 재료 손질부터 시작했다.
채 썬 양배추 절반에는 들기름과 소금, 그리고 김가루를 넣어 저속 노화 샐러드를, 나머지 절반에는 감자 전분 가루 두 스푼과 소금을 넣어 양배추 전 반죽으로 만들었다. 반나절 불린 병아리콩을 푹 삶고 건져내어 간장 휘리릭, 올리고당 뿌지직 넣고 졸이니 병아리콩 조림이 되었다. 채 썬 감자와 당근을 볶다가 물을 자박하게 넣고 연두 두세 바퀴 가볍게 넣어 살짝 찌듯이 볶으면 감자나물이 완성된다.
손질한 야채만 넣어두던 반찬통에 진짜 반찬들을 소복하게 담아 식히고 있노라니, 비로소 음식을 해먹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갓 만든 반찬들을 이렇게 식혀두는 날이면 오가며 많이도 집어먹었었는데. 본 대로 배운다고,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한두 시간 반찬을 식히는 과정을 갖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원물만 나열되어 있던 냉장고에 반찬통을 채워보고 있다. 하나를 다 먹어갈 때쯤이면 기억 아래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여러 장면들을 꺼내어 보며 요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고민해 본다.
달짝하기도, 고소하기도, 가끔은 새콤하거나 매콤하기도 했던 작은 맛들이 일상을 꼼꼼하게 채워주는 듯하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자라며 먹어 온 것들로 결국에는 돌아가게는 걸까? 얇게 썬 오이에 소 불고기를 함께 볶은 반찬도 참 많이 먹었었는데, 조만간 해봐야지 싶다. 차곡히 쌓아갈 내 반찬들이 하루하루를 뎁히고 또 채워주기를. 이 반찬을 함께 기억할 사람들이 생기는 삶은 어떨지를 막연히 상상해 보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