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픈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속 Apr 16. 2019

밀실에서의 15분 #2

머리 얼마나 오래 감으시는지?


질문이 아마 좀 생소하게 느껴질 것 같다. 머리 감는데 얼마나 걸리는 지 시간을 재보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비단 머리 감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전후에 수반되는 일련의 '씻기' 과정에 본인이 얼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독했던 지난 여름. 안경을 쓰고 땀을 많이 흘리다보니 안경테와 두피가 닿는 자리 주변으로 건선이 생겨 전용 샴푸를 처방 받게 됐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마른 머리에 처방 받은 샴푸를 적당량 도포후 15분 동안 가볍게 맛사지 하고 물로 헹궈낸다. 이때 물과 만나면서 거품이 난다.


집 샤워 부스 크기가 공교롭게도 광선치료 기계와 비슷한 넓이라서 지난번 언급한 광선 치료의 습식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쨋든 알몸으로 15분간을 보내는 형벌(?)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알몸인 상태는 똑같고 젖은 채로 있어야 하니 더 힘든 면도 있지만, 시간도 모른 채 눈 감고 있어야 하는 광선치료 기계와는 달리 내 집이니 조금 편하긴 하다. 음악을 듣거나 타이머를 준비해 간간히 볼 수 있으니 훨씬 견딜만한 지옥이라 해야할까.


15분 머리 감는게 뭐 어렵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15분 내에' 와 '15분을 채워' 는 많이 다르다. 보통은 그 15분이 긴지 짧은지도 잘 모를 것이다.


약속이나 출근 시간, 학창시절 'x분 내에 씻고 집합' 같은 바깥 생활의 맥락에서는 초침을 살피는 예민함을 보이지만 집에서 씻는 시간은 기분에 따라 길어지기도 짧아 지기도 하니 애초에 잴 수도, 잴 필요도 없는 영역의 것이다.


씻고 나와보니 즐겨 보던 드라마가 이미 중반을 넘어섰다던지 뉴스가 끝나있다던지. 보통은 그 정도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15분을 채워 욕실에 있다 보니 나는 참 빨리 씻는 사람이었음을 여실히 느끼게 됐다. 15분을 최대한 잘 버텨 보기 위해 양치질도 하고 팔, 다리, 몸을 정성껏 씻으며 시간을 메꿔 보는데 그래도 정말 지루하게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래봐야 15분인데. 그게 그렇게 길다. 난생 처음 수염도 조금 길러보고 있는데 수염 정리하는 일이 이 시간을 채우는 데에는 더할나위 없는 소일거리가 된다.


심할 땐 매일 사용했고 많이 나아진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사용 빈도를 낮춰 밀실 감금의 형량(?)이 조금 낮아지긴 했다. 문제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조금씩 샤워실에 15분동안 있기가 불편해진다는 것. 겨울 동안은 별 수 없이 더운물을 틀어 둬야 할텐데 그 물로 뭘 하면 좋을 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처음 이 글을 적어둔 게 2016년인데 어느덧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2019년이 되었다. 광선 치료는 이제 더이상 받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주 1회 정도는 15분간 샴푸를 한다. 요령과 재주가 많이 생겨서 이젠 TV를 보며 밖에서 15분을 채운 뒤에 욕실에 들어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현재 머리 길이에 맞게 적당량 샴푸를 짜내 흘리지 않고 세심하게 잘 도포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쓰고 있는 제품은 클로벡스 샴푸 Clobex shampoo 라는 전문 의약품이다. 의사 처방이 필요하고 스테로이드 역가 Steroid potency 1등급 에 해당하는 강한 약제로 올바른 사용법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최고 강도의 스테로이드제이지만 짧은 시간 발랐다 헹궈내는 식으로 적용하기에 용법만 잘 지키면 오랜 시간 부작용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내 담당 선생님의 처방 소견이고, 실제로 아직까지 큰 부작용 없이 유지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밀실에서의 15분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