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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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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속 Sep 06. 2016

밀실에서의 15분 #1

5월 무렵부터 일주일에 두 번 '전신 광선 치료'를 받고 있다. 먹는 약으로 더 이상 큰 호전이  보이질 않게 되어 자외선 치료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었다. 지난 겨울 발리 뙤약볕에 피부를 노출시켰을 때 많이 호전된 적이 있는데 그걸 인공적으로 받는 셈이라고 보면 된다.


샤워 부스 정도 크기의 장비에 들어가면 사방이 모두 자외선 램프로 빼곡히 채워져 있고 일정 시간을 쬐고 나오면 되는, 어떻게 보면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치료이기도 하다. 약간 더운 것 외에 이렇다 할 고통도 없으니.


참고 이미지. 동일 기기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실제 광선 색은 보라색에 가깝고 도어 내부에도 램프가 빼곡히 들어차있다.

처음엔 2분, 3분 정도로 짧은 시간만 광선을 쬐었으나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는 10~15분을 저 안에 들어가 있게 된다. 속옷 한 장만 입고 얼굴은 보호(피부가 약한 곳은 화상을 입는다)를 위해 수술복 색상의 두건으로 가리고 있는, 어쩐지 납치당한 듯한 몰골로 눈 감고 15분 정도를 가만히 보내는 것이다.


시간 감각이 유실된 15분은 생각보다 무척 길다. 궁금하면 타이머 켜고 한 번 해보시길. 이 정도면 거의 다 안 됐어? 싶을 때가 아마 딱 5분 정도일 것이다. 특별히 명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학창 시절 벌 서듯 단체로 눈감고 있어본 이후 거의 이런 경험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몇 달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저 안에 들어가면 우주에 부유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 혹시 기계가 고장 나 타이머가 작동 안 하는 건 아닌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 어떤 영화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 적 있다고 한다. 보지 말아야지


궁여지책으로 숫자를 세어보기도 하고, 분당 맥박수와 혈압을 먼저 재어 보고 치료가 시작되면 내 심장 박동수를 세어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박에 신경 쓰면 맥박이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맥박이 좀 빠른 편이라 10분의 시간이면 8-900 정도 숫자를 세어야 하는데 그게 머릿속으로 제대로 세어질 리가 없다.


상념이 꼬리를 물다보니 이건 분명 의료기기 UX가 제대로 설계 되질 않았구나 하는 직업병적인 결론에까지 결국 도달했다. 다분히 '오퍼레이터의 조작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로서의 관점에서 설계된 장비가 틀림없다. 의료기기인데 그 안에 있는 환자의 경험을 설계도에 넣지 못했고, 대부분의 환자들은 아마 나처럼 매 번 그 안에서 허우적 대고들 있을 것이다.


기술 제약이던 예산 부족이던 뭐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가만, 근데 시계가 그리 어려운가? 음성안내까지는 안 되어도 간단히 1분 단위로 차임벨만 울려 줘도 맥박을 수백까지 세거나, 밀실 살인 같은 흉흉한 상상을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홍대 제네럴 닥터의 디자인 세미나에서 언급된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픈 건 환자인데 왜 의사가 더 편한 의자에 앉나요?" 의료 서비스는 환자를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고 당연히 말들을 하지만, 여전히 환자 입장에서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다 보면 맨몸에 차가운 기계를 껴안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기계가 가진 실제 온도가 차갑기도, 그 안에서의 경험이 차갑기도 하다.


의료기 산업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으니 더 심층적으로 할 말은 없다. 분명 이런 고민을 하는 관련 디자이너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는다. (GE, 지맨스 정도 아닐지) 부디 가까운 시일 내에 따뜻하고 배려 넘치는 의료기기가 가득 채워지기를 기대해 보는수 밖에.

 

한 편에 다 쓰려했는데 쓰다 보니 길어져서 또 다른 밀실에서의 15분 얘기는 별도로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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