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픈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속 May 26. 2016

휴직후 3개월

드라마는 없었다

휴직을 한 지 3개월이 지났고 어느새 4개월이 지나간다. 당초 계획했던 3개월의 1차 휴직기간을 추가로 연장해 3개월을 더했다.


드라마는 없었다

수년에 걸쳐 서서히 쌓여 나를 좀먹은 질병이 석 달만에 씻은듯 사라지는 기적 같은건 애초에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조금 잔인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어차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조금씩 건강을 잃어가며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니까. 다시 젊어진다거나 없었던 일처럼 씻은 듯 치유되는 일 같은 건 세상에 없다. 모처럼 만나 아니 어쩜 그대로에요. 하는 말 역시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희망적인 부분이 있다면 휴직중 사명감을 갖고 수행한 휴식과 여행, 치료가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병원에서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꺼내 비교 해보니 50% 이상 병변이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여전히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악화와 완화가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쨋든 거친 기세로 덮쳐오던 먹구름이 이제 서서히 멀어져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먹는 약 처방을 줄이고 조금씩 자생력을 키워보는 방향을 시도해본다는데 과연 어찌 될 지는 지켜 봐야 할 일이다. 지속 가능한 치료는 결국 자연 치유법이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학술적으로 기록하고 연구자처럼 접근하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해서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우려할만한 큰 부작용 없이 잘 버텨내고 있다.


익숙하고도 낯선 사무실

휴직 연장을 위해 오랫만에 찾아간 회사는 여전히 바쁜 표정으로 묵묵히 일하는 동료들이 앉아있다. 분주하게 들리는 키보드 자판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를 배경으로 전화 목소리가 언뜻 언뜻 들린다. 익숙하면서 낯설다. 아휴 여전 하구나.


예술 작품을 보는 즐거움의 유형 중에 주인공이 처한 환경에 자신을 투영시켜 얻는 동일시의 유형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것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그렇지 않다는 위안에서 오는, 약간은 좀 비겁한 즐거움인데, 미안하지만 이 날의 감정은 후자쪽이다.


어쨋든 모처럼 인사를 하니 잠시 창문 연 듯 한번씩들 술렁이며 웃음을 지어준다. 휴직 시점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지금 나는 거의 새 사람이 된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 같다. 놀란 그들에게,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히 발견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치며 스몰톡을 이어갔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미안하지만) 나보다 더 아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모두가 피해자

조직생활이라는 건 아무리 적응 하려 해도 좀처럼 편안할 수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세상을 그렇다고 혼자서만 살아갈 수 있을 리 없겠고,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함께여야 하는게 인생이니 나름의 방식으로 수를 내야만 하는게 평생의 숙제다.


회사 생활을 7-8년간 해보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조직 내에 모두가 저마다의 맥락에서 피해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업무라는 것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인간 사이의 역학관계에 휘둘리며 아파하고 쓰러진다. A가 B를 못살게 군다.는 류의 이야기를 단순히 보스와 부하직원 혹은 동료간의 불화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결국 조직 자체의 피라미드형 위계에 업무가 끼어들고 개개인의 인간성과 스타일이 착색되니 그렇게 사단이 난다. 아니. 안 날 수가 없지 않나. 뭐, 해결이 될만한 시스템도, 답도 없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세상이니까 말이지.


성공했다고 불리는 사람들은 정말 운좋게, 혹은 각고의 노력으로 일과 조직과 취미와 개인의 흥미를 거의 일치시켜낸 것 같다. 사실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1등 학생인데 취미도 공부이고 그게 너무 즐거워서 너무나 행복한 그런 것일까나. 근데 그런 사람이랑 나같은 보통의 사람이 일을 하면 난 분명 무척이나 괴롭겠지. 오랫만에 다시 앉은 내 책상에서 이런 생각들로 잠시 멍하니 있다 일어났다.


저녁 식사 시간 무렵이 다가오니 조금 뒤 같이 식사 하지 않겠냐 한다. 밀리기 전에 가겠다며 고개를 저으며 돌아 나왔다. 뭐라 설명해야할 지 모를 미묘한 악감정 비슷한 기운이 뻗쳤던게 사실이다. 앞서 말한 모두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라 볼 수 도 있겠다. 개개인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지만 그냥 그 집합 자체로서 풍기는 조직적인 기운이 싫어서였다.


그래. 그간 몸만 아픈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 지급 받은 3개월로 될 지는 의문이다. 어떻게 해야할 지, 얼마나 더 걸릴 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딱히 정해진 시간 안에 방학숙제처럼 해치울 수도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필요한 건 여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