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픈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속 Mar 12. 2016

필요한 건 여름이었다

열흘 간의 발리

병가휴직중인 건선 환자로서 발리에서 받은 치유의 기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객으로서의 이야기는 여기 있습니다. 내용이 겹치지 않으니 둘 다 보셔 됩니다 :)


지난달 즉흥적으로 발리에 다녀왔다. 서핑에 빠져든 T형이 설 연휴를 끼고 무려 3주간 머무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역시 명절이 지나자마자 곧장 따라나섰다. 휴직자의 낭만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작년 가을 무렵, 다니던 한의원 원장님이 겨울엔 자기한테 오지 말고 따뜻한 나라 가서 햇볕 많이 쬐고 푹 쉬다 오는 게 돈도 적게 들고 치료 효과는 더 높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당시엔 휴직을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 참 배부른 소리로군' 하고 웃어넘겼는데, 올 초 휴직을 하게 되면서 실제로 그 말씀처럼 여름 나라에 흔쾌히 갈 수 있는 배부른 사람이 된 것이다.   


Bali: Never ending Summer

열대의 휴양지라면 다 해당될 말이겠지만 발리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단연 '지치지 않는 여름'이다.

서핑은 허벅지와 허벅지 그리고 허벅지 근력이 좋아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게 참 많은 여행이었다. 서핑은 현지인 튜터를 통해 겨우 1시간 정도 체험해봤다. 노래방에 왔으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발리에 왔으니 마땅히 한 번 해본다는 취지였다.


보드 위에 엎드려 있다가 파도에 맞춰 선생님이 확 밀어주면서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면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약 3-5초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몇 초의 쾌락이 끝나면 1리터 정도 짠물을 마시고 다시 집채만한 파도를 거슬러 바다에 나가는 중노동을 해야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것들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잠깐만 해봐도 충분히 사람을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게 한다.


지금도 저 사진 속 인물이 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연못이나 시냇물에서 물수제비 뜨는 걸 좋아하는데, 그 돌멩이 위에 서있는 기분이라는. 굉장히 새로운 장르의 기분을 느꼈다. 죽을뻔했다.



빛의 치유

지난 여름 반팔, 반바지를 한 번도 입지 못했는데 여행지에 오니 이방인이라는 가면 덕에 부끄럼 없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야 말로 who cares?

볕이 워낙 강해 모래밭에 누워 뙤약볕을 쬐는 고행을 하지 않고 파라솔 그늘에 누워 있어도 살이 까질 만큼 탔다.

서쪽 해안에 있을 땐 종일 빈백(모래가 들어있으니 엄밀히는 샌드백)에 누워 일몰을 기다렸다.


서핑을 아주 잠시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다면 파도의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발리가 왜 서핑의 성지인 지 알 것 같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 음식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


어쩌면 약간 무모했을 지도 모르겠다.

발리에서 식단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다.


현지에 도착해 한 두 끼 정도 먹어보고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앞서 붙인 사진에도 보이듯 현지 맥주 빈탕BINTANG은 거의 매 끼니마다 두 병씩은 비워냈다.


수행이 부족한 탓에 저런 바다를 맥주 없이 견뎌낼 재간도 없다. 게다가 T형과 함께가 아닌가.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함께 해외여행을 함께 올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 음식이 결코 내 몸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더운 날씨 덕에 음식이 쉽게 상해서인지 현지 음식 대부분이 튀김/볶음 요리였고 양념도 맵고 짠 것들이 많아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 편이다.


또 서양인 관광객이 주류다 보니 버거나 피자, 파스타 잘 하는 곳이 많다. 허름하게 쓰러져가는 와룽warung(발리 현지 식당)에서 그림 같은 디쉬가 나오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저렇게 한 상 가득 씩 먹어도 3만 원대. 빈탕과 함께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T형은 내가 이렇게 잘, 많이 먹는 것은 20여년 간 만나면서 처음 봤다는 얘길 했다. 대수롭지 않게 그런가? 하고 넘겼지만 꽤 중요한 얘기였다.


식욕이라는 것은 단순히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욕과도 관계가 있다.


appetite = appetitie for life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여행 중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한 피부는 그을리고 벗겨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느라 바쁘고 귀찮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약도 안 먹고 안 발랐는데.



땀의 치유

나는 여름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절친한 친구들은 의례 여름에 내게 어디 가자고도, 만나자고도 하지 않는다. 여름은 내게 질병 같은 계절이며, 여름을 난다는 건 곧 여름을 앓는 것과 같았다. 더워서 여름 휴가도 안 간다.


여름이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단연 땀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른 체형임에도 땀이 무척 많은 체질이다. 더운 것 자체만으로도 가혹한데, 남들보다 속절 없이 더 많은 배설물에 시달려야하는 형벌의 계절이 바로 여름인 것이다. 땀으로 폐를 끼치는 불상사를 피하려는 방어기제 때문에 최대한 더 꼼짝 않고 가만있으려 한 것도 같다.


도시에서는 땀 흘릴 공간이라는 게 무척 한정적이다. 땀도 배설의 일종이라 몸 밖으로 나왔으면 어떻게든 빨리 청결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사우나, 찜질방, 헬스클럽처럼 씻어낼 공간이 전제되어있지 않으면 양껏 땀 흘린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내가. 30도가 넘는 오후의 논길을 한 시간 넘게 걸었다.


지금 흘린 땀의 양과 서핑하며 마신 바닷물의 양 중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저울질해볼 만큼 많은 땀을 흘렸다.  


회사에서 하루 1리터 물을 먹으려고 시간마다 울리는 어플의 힘까지 빌려 스스로를 물고문했던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발리에서 지내는 동안 자연스레 물을 하루 1리터 이상 마실 수 있었다.


끝없는 여름의 이 나라에서는 땀 흘리는 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살이 스칠 땐 늘 약간의 습기가 마땅히 있고, 그것이 내게 닿는다 하여 결코 불쾌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하게 조금은 기름지고 눅눅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땀을 기꺼이 숨김없이 흘리고 이 날씨를 이렇게 살아보니 뭔가 조금 더 남자. 아니 사람이 된 기분도 들고 아. 이렇게 해도 되는 거구나.랄지 이렇게 하는 거구나.같은 묘한 깨우침이 찾아왔다.


바지만 입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고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였던 께뚜Ketut는 짐을 들어주고, 아침을 가져다주고, 청소를 하느라 젖은 몸으로.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젖은 나를 늘 반갑게 맞아줬다.


내성적인 편이라 여행지에서 친구가 생긴다거나 사진을 함께 찍는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데 이번 여행은 유독 현지 사람들 사진이 많다.


나 자신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 이 병을 다스리려면 결국 내가 다른 성향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던 장본인인, 이번 여행 동행인 T형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일주일쯤 되니 굳이 흑백으로 바꾸거나 하지 않아도 징그럽지 않을 만큼의 상태가 되어있었다. 위 사진을 친한 친구들에게 보내주니 모두가 환호했다.


비밀의 열쇠는 결국 햇빛과 땀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도 싫어했던 여름이었나.



무엇을 얻었는가

이번 여행 중 다시 읽은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구절로 대답을 대신 하며 허무하게(?)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아무리 안간힘 써도 이 느낌을 내 언어로 제대로 적어낼 자신이 없다.  


발리 이후의 나는 분명 뭔가 달라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외자로 살아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