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의 단편 철학 #2
관성처럼 돌아오는ㅡ그저 아파트가 서있는 공간 외엔 이방인으로서의 위치가 당연한 이 동네의 저녁 시각에, 저는 버스정류장에서 몇 걸음 안 되는 짧은 골목을 초췌한 얼굴을 기울이며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골목에 막 들어서자 저쯤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는데,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 친하지 않은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이었고, 고작 한동짜리 아파트에 같이 살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졸업 후에 동네에서 가끔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나를 못 알아본 것인지, 제가 그랬듯 모른 척했던 것인지, 거의 십 년간 결코 아는 체하지 않았죠.
그날 저는 막 세상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젊은 직장인으로서 청바지에 맨투맨티, 날렵한 스니커즈 운동화, 노트북이 들어있는 잔스포츠 백팩을 한 어깨에 맨 채 빠르고 넓은 보폭으로 아파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그녀는 발목 바로 위까지 기장이 내려오는 꽃무늬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아파트 골목 앞에서부터 제 쪽으로 주황의 가로등 불빛을 하나둘 넘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녀의 허리춤에는 한 사내아이, 거의 10살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녀를 향해 사선으로 얼굴을 들어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둘이 어떤 이야기들을 친근하게 나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나는 그녀가 결혼했으며 그 아이는 그녀의 아이구나 하며 약간 놀랐다가, 어쩐지 아이가 너무 자란 듯 보이기도 해서, 가능한 다른 관계를 잠깐 탐색해 보다가 이내 찾는 것을 그만두어버렸습니다. 그녀도 나와 같이 앳된 청년임이 분명하니 그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가도, 그러나 다시 그 둘의 친근한 그림자, 하나로 둘로 붙었다 떨어지는 사이의 친근함을 보면 그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자연스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짙은 어둠에 잠긴 아파트는 수직으로 빼곡한 층계참 창문들을 희미한 빛으로 빛내며 막다른 절벽처럼 골목 끝을 막아섰고, 골목은 고요하게 제 쪽으로 어둠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수명을 다한 주황의 가로등 불빛은 그 둘에 관한 미미한 시각적 힌트만을 주며 낯선 실루엣을 흔들어 제 쪽으로 천천히 밀어냈습니다. 좁혀지는 거리에 저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제 쪽으로 그들이 밀려와 종래에 바로 옆으로 스쳐 갈 때, 저는 곁눈으로 그녀 넘어 사내아이의 웃는 얼굴을 또렷이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선을 옮겨 아주 가까이에서 아직은 너무 앳된 그녀의 옆얼굴과 고등학생 때와 똑같던 긴 생머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찰나, 그들이 제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 저는 아련한 충격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그것은 현재에서 10년 전으로, 다시 10년 후로 순식간에 바뀌는 느낌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게 시간은 어떤 변화도 알아채기 힘들 만큼 조금씩 조금씩 흐르고 이어져, 단지 어제와 그 전날의 일만이 생생할 뿐, 5년 전이나 10년 전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랜 느낌으로도 기억나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과거 그 모습 그대로인 그녀를 통해 아주 생생한 과거로 돌아갔다가, 그녀 허리춤에 매달린 시간의 덩어리를 마주하고 그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새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나란한 두 걸음의 시간 동안, 10년의 시간이 스쳐 지나는 느낌을 받은 저는, 어찌할 바 모르는 그리움과 휙 하고 빠져나가는 감정을 그대로 허무하게 놓아주며 그들이 걸어 나온 골목, 제가 원래 향하던 아파트 창의 한 점을 향해 그저 계속 걸을 뿐이었습니다.
걸어가면서 저는 시간의 덩어리가 그렇게 장성하여 클 동안에도 이 곳은 한결같이 빛바래고, 여전히 촌스럽게, 또 더럽고 때 묻은 상태로, 그렇게 퇴적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20년을 이 동네에서 살면서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인데, 오른쪽에 있는 '세동네 교회’라고 쓰인 세로간판에는 유치하게도 세모와 네모와 동그라미가 한 글자에 하나씩 나란히 붙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칙- 하는 다리미 소리를 내는 세 평짜리 세탁소에는 흰색 형광등 밑에서 세탁소 아저씨가 코에 안경을 걸치고 구부정하게 다림질을 하고 있는데, 그 작은 공간의 천장이나 양벽이 옷으로 가득 차, 안쓰럽게도 사람이 끼여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세탁을 이미 마친 옷가지들도 전혀 깨끗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바닥의 아스팔트는 무언가 냄새나는 것을 질펀하게 쏟은 얼룩으로 더럽게 물들어 있어서 불쾌했으며, 주변 상가 간판이나 입구는 모조리 이십 년 전처럼 유치하고 더러워서 정체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저는 이곳이 지금도, 형편없는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그날 똑똑히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그녀는 10년 전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지만 시간의 덩어리만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듯, 교복을 입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오는 저와 지금의 저는, 들춰맨 시간의 무게만 달라져 있을 뿐 결국 1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로라는 것은, 그녀와 내가 속해있는 여기 - 10년 전과 다름없이 어떤 발전도 어떤 희망도 없이 낙후되어 있는 이 거리와 이 동네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바로 벗어나 활발하고 번화한 도심으로 이상을 찾아 달려가지만, 결국 돌아오고야 마는 곳이 이 곳입니다. 저는 오늘도 어두운 골목의 끝인 아파트의 한 점으로 빨려들듯 발걸음에 매달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낡은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집안의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이 아파트, 전혀 세련되지 않은 미련한 골동품이 마구 적재된 공간에서 고고한 취향만 밝히는 제 모습을 떠올리며, 완전한 이방인으로써 이곳에 거주하는 그,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자각 조차 없어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그를 발견한 순간, 네 이상의 많은 것들은 그저 허황된 것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