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도 멘탈도 털린 영국 유학

by JANE


드디어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배움의 세계로 들어왔지만, 2년 내내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의문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재능이 없었나?’


영국 학사는 3년 과정이었지만, 2학년 말이 되도록 난 내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애매했고, 무난했다. 과감함, 위험함, 대담함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안전한 선택지 안에 머물러 있었다. 수동적인 아시안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달까.


희미한 존재감. 조금이라도 튀면 시선이 따라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 패션 전공자들로만 가득찬 학교에선 어지간히 튀지 않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열몇 명 남짓한 우리 반만 봐도 멜팅팟 그 자체였다.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러시아, 핀란드, 스웨덴, 영국, 스페인, 한국, 중국, 홍콩까지, 국적도 다양했고, 나이도 만 17살인 가장 어린 친구부터 가장 나이가 많은 28살의 나까지 있었다.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이 친구들 모두 패션을 향한 흘러 넘치는 애정과 열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로 홀로 유학을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늘 적극적이었고, 당당함이란 갑옷으로 무장한 것 같았다.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이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묻어 있었다. 쑥맥이었던 나의 20대와는 달리 훨씬 성숙한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저 나이에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독립적으로 밀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생의 중심이 부모나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움직이는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옷차림에도, 행동에도, 작품에도 자유로운 선택과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온 친구는 스페인에서 온 17살 조이(Zoe)였다. 팀 과제를 함께 하다 친해졌는데, 그녀의 안목은 우리 반에서 단연 최고였다. 한 번은 그녀의 맥북으로 이미지 리서치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선택 하나하나가 어찌나 탁월한지 한동안 빠져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화면은 화면 보호기만 떠다니다 못해 꺼져버렸는데도 말이다. ‘쟤는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길래 저런 기가 막힌 아이디어들을 뽑아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보 촬영은 물론이고 시험이든 에세이든 빠짐없이 고득점을 받았고, 외부에서 화보 협업 제의도 꾸준히 들어왔다. 약간 과학고에서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 간 수재 같았다. 그렇다고 범생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담한 키에 긴 생머리, 짙은 아이브로우, 장미빛 립스틱 컬러는 그녀의 시그니처 메이크업이었고,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는 골초에 가방엔 늘 예거마이스터 한 병이 들어있었다.


내가 Z발음을 제대로 못해 늘 조이(Joy) 라고 불렀지만 희한하게도 그녀의 텔런트는 보는 나에게 어떤 기쁨 또는 쾌락을 주었다. 아마 훔치고 싶을 만큼 탐나는 재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모로 유니콘 같은 그녀였다.


비교는 악의 근원인 것쯤은, 비교가 만연한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자란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와서도 잘하는 친구들에 비해 내 실력은 너무 초라해보였다.


배우고 경험하러 온 건데, 결국 잘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개성 강한 친구들 속에 섞이다보니 ‘왜 난 뭐 하나 특출난 게 없을까’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종종 유학이라는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피드백도 한몫했다


“너무 상업적이다”

“너의 색이 더 필요하다.”


문제는, 내 기준엔 분명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더 답답했던 것은, 선생님들이 던지는 끝없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었다. 초기 컨셉을 하나 골라가든, 완성된 작업물을 보여주든, 모든 과정에 ‘왜’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마치 질문 살인마처럼. 어찌저찌 대답을 하면, 압박 면접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썩 괜찮은 답변을 하는 게 어찌나 어려운지. 솜덩이라도 삼킨 것처럼 말문이 콱 막히기 일쑤였다.


과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와도 좋은 성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매 수업마다 10~15분씩 1:1 피드백이 진행됐는데, 이게 끝날 때마다 멘탈이 탈탈 털렸다. 갈피가 잡히기는커녕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다음 주에 다시 컨펌 받을 생각만 하면 아주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선생님의 오케이 사인은 받아야 했기에, 내가 준비해 간 작업은 늘 엎어지기 일쑤였고, 주제도 내용도 계속 바꿔야만 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야 정답이야”라고 하는 주입식 교육과 일방적인 소통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결과만 보여주면 됐던 것과 달리, 여기에선 내가 낸 아이디어 하나하나와 그 모든 과정에 대해 수면 위부터 저 바닥 깊숙한 곳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프로젝트 하나에 벽돌 두께의 백과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영국식 리서치의 세계인가 싶었다.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데드라인은 촉박한데 의미 타령하다 시간이 다 흘러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설득이 되는데, 왜 남에겐 같은 생각을 전달하지 못할까. 머리를 열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족한 영어로 답하려니 더 막막했다. 머리속에서는 할 말이 계속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는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과제의 주제를 정할 때, 그것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의 방향성을 정할 때, 나는 과연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밀려오는 과제들을 어떻게든 빠르게 처리해내는 데만 급급했던 건 아닐까.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선택한 유학이, 어느 순간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태 수 많은 밤을 지새웠는데, 이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쩌면 나의 능력은, 그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고 좁은 수조 정도 아니었을까.’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유학이라는 환상과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여기 오면 뭐라도 되어 돌아갈 줄 알았나. 어느 순간부터는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 졸업장이나 따고 가자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런데 마지막 해에 만난 누군가의 한마디가, 이 소심이를 움직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