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리 May 19. 2022

연극계 검열과 "외설적인" 것

폴라 보글의 <외설적인>이 말하는 다양성 표현의 난제

지난 2016년에는 정부에서 만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밝혀져 공연계가 떠들썩했죠.

 
주로 "외설적인" 또는 "적절치 못한" 소재라는 이유로 문화예술 컨텐츠가 검열되곤 하는데요. 사실 "외설적인", "적절치 못한"은 굉장히 애매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객관적 지표의 부재 속 검열의 흔적은 한 사회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주 최근작인 <외설적인>(2015)을 통해 다양성 논의의 현주소를 짚어보겠습니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


지난 시간에는 다양성 논의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정성의 허구성’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어서 오늘은 교차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게요.


인권 운동 초기에는 인종, 성별, 종교, 언어 등 각종 소수 집단들이 정치적 가시성을 위해 단일한 정체성을 내세웠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단일한 정체성을 대표하는 카테고리들이 실제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개념 “교차성(Intersectionality)” 또는 “상호교차성”은 정체성이 칼로 자르듯 나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교차하면서 복잡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 관심을 가집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교차성이 존재하는데요. 한 번 나의 교차성은 어떤 모습인지 알아볼까요? UC 어바인에서 제공하는 연습지를 한 번 마음속으로 작성해보세요.


작성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가운데 네모에 적으세요. 왼쪽에 나열된 8가지 정체성 분류를 보고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적어보세요. 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네 가지를 찾아 오른쪽 동그라미 안에 적으세요.

(8가지 정체성 대분류: 인종/민족성, 성 정체성/성적 자기표현, 종교, 시민권(국적), 장애/비장애, 사회경제적 지위, 성적 지향, 나이/세대)

여러 영역이 존재하는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 교차성 때문에 하나의 집단 안에서도 의견은 항상 상충하기 마련입니다. 더더군다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교류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 현재에는 교차성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하겠죠.


이 교차성이 연극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또 연극은 현대의 교차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폴라 보글(Paula Vogel, 1951~)의 <외설적인(Indecent)> (2015)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외설적인>(인디센트 Indecent) 줄거리


<외설적인>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명 극작가 폴라 보글과 연출가 레베카 테이치만(Rebecca Taichman)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합작해 만들어낸 명작인데요. 전체 과정은 약 8년, 배우들과 협업하면서 내용을 구체화한 것은 2년가량이 걸렸다고 하니, 정말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2세에 <복수의 신>을 읽고 레즈비언 유대인으로서 크게 감명받았다는 폴라 보글의 2020년 사진입니다.

(출처: https://yale2020.yale.edu/honorary-degrees/paula-vogel)


<외설적인>은 <복수의 신(God of Vengeance, 1918)>이라는 극이 만들어지고 상연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극 외부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극 내용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복수의 신>이 마주한 다양한 검열 시도를 조명하여 현대 관객이 공연과 검열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요. <복수의 신>은 실제 있었던 극이고, 검열 문제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외설적인>은 한 연극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외설적인>의 포스터입니다. 두 여성의 로맨틱한 장면 앞에 빨간 도장으로 "외설적인"이라고 찍힌 느낌을 내어 검열이라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출처: https://www.amazon.com/Indecent-TCG-Paula-Vogel/dp/1559365471)


극 초반은 젊은 유대인 극작가 숄럼 아시(Sholem Ash)가 <복수의 신> 집필을 완료하고, 당시 유대어 중 하나인 이디시어 연극 부흥운동을 이끌던 페레츠(Peretz)에게 선보이지만 부정적 반응을 얻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연히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레믈(Lemmel)이 원고에 완전히 매료되고, 그가 적극적으로 상연 가능성을 알아본 끝에 <복수의 신>은 자유로운 영혼이 모인 베를린 무대에서 성공을 맛보게 됩니다.


<복수의 신>은 독실한 유대인인 아버지가 사창가를 운영하는 한편 딸의 순결을 지켜 랍비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그 사이 딸은 아버지 휘하의 매춘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거룩한 유대교 경전과 같은 토라(Torah)를 내던지며 딸에게 매춘부가 되라고 소리 지릅니다. 토라는 땅에 닿으면 안 되는 신성한 물건이므로 유대 사회에는 이것이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베를린에서의 성공에 힘입은 <복수의 신>은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는데요. 브로드웨이 상연 기회가 찾아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미국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서 <복수의 신>은 터무니없는 미국화된 번역을 따라야 하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꾸고, 반드시 영어로 전체 대사를 전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연극의 백미로 꼽혔던 “빗속 장면”이 여성 간의 로맨틱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삭제를 강요받게 되어요. <복수의 신>의 가장 열정적 지지자인 레믈은 빗속 장면을 지키려고 하지만, 막상 극작가인 숄럼 아시가 브로드웨이의 모든 수정 요구에 합의한 것으로 밝혀지자 크게 실망합니다. 영어 문제, 검열 문제로 주요 배우들이 대체된 상태로 올라간 <복수의 신>은 공연 첫날 출동한 경찰에게 연행 및 구속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숄럼 아시는 폴란드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자행되던 유대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큰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미국이 강요하는 유창한 영어에 대한 부담과 동시에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예술의 효용성까지 의심하게 된 숄럼 아시는 레믈 등 여러 인물의 열정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버립니다.


극 후반은 레믈과 극단이 폴란드로 돌아가 나치의 전횡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연극을 통해 유대인에게 희망과 힘을 끝까지 전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검열되었던 “빗속 장면”은 한 다락방 임시 무대에서 관객에게 선보여지고, 이후 모든 극단 멤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비유적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영혼으로 돌아온 레믈은 다른 결말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며 리프켈레와 만케, 즉 <복수의 신>의 두 주인공을 역사 속 죽음에서 도망치도록 돕습니다. 도망친 두 주인공은 자막 없이 이디시어로 빗속 장면을 재현하고, 이와 함께 극의 막이 내립니다.


"빗속 장면"입니다. 소박한 무대로 두 여성 간의 깊은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출처: https://www.npr.org/2017/04/29/526157986/-indecent-a-play-about-a-yiddish-play-that-was-ahead-of-its-time)




<외설적인>에는 수많은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극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주제들에 대해 그 부당함을 이야기하는데요. 크게 유대인, 동성애, 이민자 문제 세 가지가 정치적 반감을 사서 <복수의 신> 상연에 지장을 줍니다. <외설적인>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낙인찍혀 부정되고 멸시되었던 이 세 가지 요소를 마땅히 존중받는 위치로 되돌려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차성이 드러나는 지점은 이 세 가지 요소가 혼재한다는 것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 가지 주제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극은 외부 검열 못지않은 강력한 내부 검열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폭압에 저항하는 소수 집단들의 품위와 이상, 또는 종교적 이상이 그들의 “일관적이지 못한” 모습을 통해 위선으로 바뀝니다. 몇 가지 예시를 볼게요.


<복수의 신>에서 독실한 종교인인 아버지는 사창가를 운영하며, 자신의 딸을 랍비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뇌물을 사용한다.

유대인을 위해 쓴 공연은 유대인을 위해 만들어진 극단에서 거부당한다.

<복수의 신>의 브로드웨이 데뷔 공연 날 이들을 신고한 것은 외부인인 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 랍비였다.

<복수의 신>의 극작가 본인이 자신의 극에 등을 돌리고 그 가치를 부정한다.

“자유의 땅”이라고 알려진 미국이지만, 미국에 오자마자 극은 가장 심하게 검열당한다. 당시 브로드웨이에서는 여성 간 입맞춤은커녕 로맨틱한 장면조차 절대 금기시되고 있었다. 또한 이디시어로 된 극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복수의 신>이 영어로 상연될 것을 강요당한다.


위의 예시들은 억압의 문제가 단순히 나와 너의 구분, 외부에서 내부로의 억압이라는 역학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구조로 얽혀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교차성이 유대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잘 드러나는 이유는 유대인의 존재가 교차성 그 자체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우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민족성과 종교 모두에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말 하나로는 둘 중 어떤 의미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유대인은 삶의 터전을 잃고 부유하며 여러 나라에 뿌리를 내렸고, 지역적, 문화적 다양성을 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통용어로 쓰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죠.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의 디아스포라 정의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이산(離散) 또는 파종(播種)을 의미한다. 본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듯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이지만, 대대적으로 유포된 반유대주의적 감성 때문에 단일민족화 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반유대주의로 고통받은 역사가 깊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여 많은 지식인들은 유대인을 긍정적 표식으로 바꾸는 것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숄럼 아시는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일관적이지 않은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첫 시도가 <복수의 신> 집필이었습니다. 극을 처음 이디시 연극 집단에게 선보였을 때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숄럼 아시의 생각이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극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유대인끼리 논쟁하고 싸우고 거부하고 신고하는 장면들은 반유대주의 정서가 유대인 내부에도 적용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극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디시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이디시어는 원래 유대인 내에서도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의 언어라고 생각하여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디시어는 새롭게 조명되며 존중받아야 할 중요한 언어라는 인식이 생겼고,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극에 등장하는 이자크 페레츠(Isaac Leib Peretz, 1852-1915)입니다. 이미 한 차례 인식의 변화를 거친 이디시어인데, 브로드웨이에서 또 한 번 제거의 위기에 처합니다. 영어에 대한 고집, “멜팅팟”으로의 융화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죠.


극을 마무리 짓는 “빗속 장면”이 자막 없이 이디시어로 진행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정치적 표현입니다. 이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져 금지된 이디시어와 여성 간 사랑을 한치의 검열 없이 그대로 올리고, 홀로코스트 속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되살려내 그들이 받아야 마땅한 아름다운 결말을 선사합니다.




메타극


<외설적인>의 극 형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바로 “메타극(metatheatre)”입니다. 영어로 ‘메타(meta)’는 ‘~너머’의 뜻을 가지니까, 메타극은 극을 넘어선다는 말이겠죠. 극을 넘어선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이 개념은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 1910-2001)이라는 극작가이자 비평가가 만든 것으로, 극이 자신의 연극성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인물들이 자신이 극 속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말을 하거나, 관객을 관객이라 지칭하고 자신을 배우로 지칭하기도 하고, 무대 소품의 인위성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는 등의 장치가 이에 속합니다.

이처럼 ‘극이 자신의 연극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 정확한 정의가 어렵기는 합니다. 이에 따르면 극중극 또한, 극 속의 극이라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관객이 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에 메타극적 요소라고 할 수 있죠. 메타극의 아주 좋은 예시는 2012년 초연한 브로드웨이 히트작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The Play that Goes Wrong)>인데요. “잘못되는 연극”이라는 제목이 말하듯 공연 도중 소품 오작동, 연기 실수 등으로 연극이 엉뚱하게 진행되면서 코믹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극의 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느낌인지 보실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DOWO4gq-whg

동영상에서 여러 실수와 극중극 상황이 현재 관객이 극을 보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에 더해 한 캐릭터는 자신이 배우이고,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즐긴다는 사실을 계속 인지하죠. 마지막에는 무대 세트가 무너지면서 무대 뒤 장면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메타극은 연극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과도 겹치는 개념입니다. 그만큼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대신 관객이 연극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죠. 그렇다면 <외설적인>은 어떤 의도로 어떻게 메타극을 사용했을까요?


우선 <외설적인>은 미국 극작가와 연출가가 미국 무대를 생각하고 만들었습니다. 제목에서도 나타내듯 극은 미국의 위선적 검열 제도에 대해 상당히 강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이를 지켜보는 미국 관객은 현재의 검열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외설적인>에서 사용하는 메타극적 기법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관객이 입장할 때 무대에는 배우와 악사가 이미 앉아있습니다.

(출처: https://theculturalcritic.com/emindecent-a-classic-play-was-deemed-obscene-and-immoral/)


관객이 입장할 때 배우들은 이미 무대에 일렬로 앉아있다. 시작 시간이 되면 서사극의 해설자와도 같은 레믈(Lemmel)이 나와 배우들을 관객에게 소개한다.

배우들은 나이대에 따라 나뉘어 한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한다.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바뀌는 것은 모자를 쓰거나 콧수염을 떼는 등 무대 위에서 간단한 동작들로 진행된다.

각 장면은 몰입감 있게 진행되지만 모두 짧으며 집중해서 연기하던 배우들이 한순간 배역에서 빠져나와 춤을 추며 장면을 전환한다.

극중극: <복수의 신> 극의 무대 뒤편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음악극: 배우가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며 악사와 배우가 함께 무대에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한다.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짧은 분절적 장면들이 전체를 이루고, 긴 내용은 “시간의 깜박임”이라는 자막과 함께 과감히 생략된다.

극의 결말이 두 번 제시된다. 한 번은 원래 극의 이야기, 한 번은 레믈이 원하는 이야기로, 관객에게 현대의 참여가 다양한 결말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극과 현실의 관계를 조명한다.


위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메타극은 단순히 연극이란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코멘트하고 극적 요소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합니다. 이를 통해 극 속의 이야기와 현실이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죠. 이런 맥락에서 <복수의 신> 상연 과정에서 주연을 맡은 두 배우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가는 장면들은 여성 간 사랑이 극 속의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극이 시작되면 <복수의 신>을 만든 과거의 인물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이야기를 전달해줍니다.

(출처: https://ew.com/theater-reviews/2019/06/12/indecent-paula-vogel-review/)




역사적으로 검열은 정치와 권력이 가시화되는 분야였습니다. 건강한 예술을 지원한다기보다는 부당한 억압과 정치적 어젠다의 도구로써 사용되어 왔죠. 이러한 검열의 문제는 누가 극을 올리는가? 누가 검열을 하는가? 직접적 검열이 아니더라도, 어떤 극이 어떻게 올라갈지에 대한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의 극 외적 요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우리나라에도 분명히 고정적, 반복적으로 올라가는 극이 있는데요. 극을 먼저 선정해 제시하기보다는 이미 제공된 공연 중 선택을 해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내 눈앞에 놓인 선택지는 어떻게 내 앞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외설적인>의 메타극적 요소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이 경험을 지배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