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의 등장과 유행
멜로드라마 좋아하시나요?
K-드라마에선 '멜로'가 주로 로맨스 장르를 말하죠. 하지만 멜로드라마는 사실 음악극이라는 이름으로, 낭만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멜로드라마가 어떻게 등장하여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접하는 멜로드라마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볼게요.
1. 신고전주의
17-18세기,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판소리가 유행할 무렵, 서유럽에선 한창 '나라(nation)'라는 개념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정치적, 문화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식민 사업과 동시에 치열한 세력 다툼을 하게 되죠. 14-18세기, 즉 400년간 이탈리아는 문화적으로 융성하고 있었고,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은 차례로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문화적 사조를 형성하여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는 이탈리아 연극의 무대와 그리스 연극의 형태를 혼합하여 신고전주의 연극 형태를 만듭니다. '신新고전'이란 서양 연극과 문화의 효시라고 생각되는 그리스를 '고전'으로 보며, 이를 새로 해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를 활용하면 따로 문화적 깊이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신고전주의는 의도적으로 그리스가 주는 권위를 이용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 연극의 관습들을 법처럼 떠받듭니다. 3일치 법칙, 5막의 준수, 장르의 분리, 단일 플롯 사용 등등 엄격한 신고전주의의 법칙들이 세워지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옳지 못한 극으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이러한 움직임은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신고전주의 극은 절대왕정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 기여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유럽 곳곳에서 신고전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극들은 우수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셰익스피어의 극들조차 법칙에 맞춰 다시 써지는 지경에 이릅니다.
갑자기 왜 신고전주의가 등장하냐고요? 신고전주의는 우리가 많이 들었던, '~주의'로 일컬어지는 서양 문화 사조들의 효시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예술의 정체성과 가치를 설정하고, 이에 맞는 예술 또는 연극의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 이 이후로 '~주의'의 이름으로 계속되거든요.
신고전주의는 또한 서양 연극의 시조로서 그리스 연극의 위치를 다시금 공고히 했고, 현재 우리가 연극 무대의 기본 형태로 떠올리는 프로시니엄 무대와 원근법을 사용한 무대 배경을 이탈리아에서 들여와 더욱 보편화시킨 업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2. 낭만주의
하지만 이렇듯 엄격한 법칙과 절대왕정이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는 없었겠죠.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은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만나게 됩니다. '인위적'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던 신고전주의 시대에 대한 반발로, 자연을 추구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특징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스러움을 넘어서서 인간과 대비되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을 선호함을 말합니다.
낭만주의는 정말 넓은 개념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고전주의와 비교하자면, 다양성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어 자연의 다양한 모습과 지역적 특성을 살린 이야기들이 인기를 끕니다. 키워드로 정리하면 '자유' '일반인' '열정과 감정'이 낭만주의의 윤곽을 그려줄 것 같네요.
3.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낭만주의의 대중문화적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낭만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낭만주의적 흐름을 타고 대중의 호응을 받아 크게 발전한 형태의 극이기 때문이지요. 19세기에 멜로드라마는 대유행을 하게 됩니다. 멜로드라마는 몇 가지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단순하고 긴장감 넘치는 줄거리
- 음악의 존재
- 사람을 착각함, 납치, 기이한 사건들, 숨겨진 문서 등이 줄거리를 이끎
- 지역적 특성이 강조되는 곳에서 적어도 한 번의 스펙터클한 장면이 정교하게 짜여 등장
- 마지막 장면의 클라이맥스에서 주로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짐
- 권선징악 (선과 악의 싸움이 극의 중심)
멜로드라마는 음악극이라는 뜻으로, 음악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뮤지컬에서의 노래가 아니라, 극의 배경음악을 말합니다. 극의 분위기를 설정하는 존재로서 음악의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말이죠.
지역적 특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주로 이국적인 장소가 배경이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멜로드라마 장르의 극으로는 <인디애나 존스>와 <툼레이더> 시리즈가 있는데요. 두 시리즈 모두 비서양 문화권에서 신비한 비밀을 파헤치는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징들을 보면 스펙터클이 강조되고 있죠. 이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무대에서 스펙터클을 연출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펙터클을 연출하기 위한 금액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아야 예산 확보를 하고 수익 창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연들은 롱런을 염두에 두고 기획하게 됩니다. 따라서 <몬테 크리스토>나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과 같이 이미 출간된 소설의 내용을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더군다나 두 작품은 영미 양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작품들이었으므로 흥미도와 흥행성이 보장되었죠. 19세기 후반에는 나라 곳곳을 연결하는 기찻길이 놓였기 때문에, 작품들은 세트와 의상, 소품 등등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투어 공연을 하게 됩니다.
[멜로드라마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표 이미지입니다. <Under the Gaslight>라는 공연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주인공은 다가오는 기차 앞에 꽁꽁 묶여있습니다.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고 있습니다.]
* 미국의 대표 극작가 유진 오닐의 아버지인 제임스 오닐이 <몬테 크리스토>의 주인공이었으며, 해당 극을 독점하여 기차를 타고 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고, 유진 오닐은 이렇게 보낸 성장기를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어둡게 회고합니다.
기차의 무대 위 등장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기술의 발전은 뜨거운 감자이자 흥미로운 주제였고, 공연들은 앞다투어 이러한 신기술을 공연의 클라이맥스에 접목시켰습니다. 디온 부시코트의 <옥토룬>에서는 악당의 범죄가 사진기에 찍힌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반전이 일어나죠. 몇 가지 예시를 볼까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드라마 하면 떠오르는 과장된 연기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그것은 당시 실내 공연장의 빈약한 조명에 기인합니다. 뒤에 앉은 관객에게까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연기가 점점 과장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멜로드라마의 단순함, 분명한 선과 악, 스펙터클의 강조 등을 생각했을 때, 이 공연 장르는 정적이거나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장르임을 알 수 있겠죠. 인물 개개인의 특성이나 서사에는 관심이 없으니 아무래도 전형적인 스토리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표현 방식도 일차원적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생각하던 멜로드라마는 어떤 영화/공연/드라마였을까요? 해당 극은 앞에서 이야기한 멜로드라마의 특징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나요?
멜로드라마가 추구하는 권선징악적 면은 노예제를 주제로 한 멜로드라마 극의 유행을 일으킵니다. 남북전쟁 전후로 노예제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은 악당으로, 노예는 선한 주인공으로 아주 쉽게 선과 악이 구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멜로드라마와 동시에 유행했던 민스트럴 쇼라는 공연을 통해 노예제와 연극의 상관관계에 대해 더 알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