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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Oct 19. 2023

소확행으로 만드는 매일의 생존

모든 멋진 것(Every Brilliant Thing)과 살아갈 용기

얼마 전 엘에이에서 <모든 멋진 것 (Every Brilliant Thing)>이라는 공연을 봤다. 같은 과 친구가 "가히 완벽한 공연"이라고 해서 보러 갔는데, 알고 보니 올해 가장 많이 상연된 극 11위에 오른 아주 핫한 작품이었다. 원래 10월 초가 막공이었는데 넘치는 수요로 10월 말까지 연장공연을 하고 있었다(지금 사이트에 접속하면 '10월 29일에는 진짜 내려야 한다'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계속 연장해 달라는 요청이 많은 것 같다)


공연은 Geffen Playhouse라는, UCLA 바로 옆에 위치한 깔끔하고 정돈된(LA 치고..) 동네에서 올려졌다. 

Geffen Playhouse의 외관. UCLA 소속이라고 알고 있다.


무대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객을 공연의 세계로 끌어들이는데, 파스텔톤의 뜨개천을 드리워 만든 입구를 지나면 갖가지 색상의 뜨개천들이 퀼트처럼 이어 붙여져 공연장 분위기를 조성한다. 바닥 역시 알록달록한 물감을 튀기듯 조합하여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예쁜 조각들이 함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왼쪽부터 무대 바닥, 공연장, 그리고 입구. 바닥의 페인트는 마치 여러 색이 모여 세상을 보는 하나의 눈이 된 것 같았다.


공연 시작 한참 전부터 주연 배우는 침착하고 편안한 에너지로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의 존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데, 그만큼 편안한 분위기를 하고 관객들에게 번호와 짧은 글이 적힌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 준다. 공연 중에 자신이 해당 번호를 외치면 그 글귀를 큰 소리로 읽어달라고 부탁하는데,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배우는 아주 자연스럽고 적당한 대화를 나누며 관객들의 관계와 특징 등을 파악한다(후에 이 내용을 공연에 사용한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종이를 받아야 하기에 공연은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게 시작한다. 


<모든 멋진 것>은 일인극이며 주인공은 이야기꾼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사방으로 둘러싼 객석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리며 모든 방향에 공평한 시선을 준다. 주인공은 서글서글이 인간화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란 생각이 드는, 시종일관 편안한 미소와 여유 있는 태도, 호의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공연의 내용이 죽음과 자살과 생존에 대한 것이기에 이렇듯 과장된 침착함은 따뜻하면서도 이질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시종일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는 주인공

(출처: https://www.broadwayworld.com/los-angeles/article/Review-EVERY-BRILLIANT-THING-at-Geffen-Playhouse-20230919)


약 한 시간 남짓의 공연 시간 동안 이야기는 주인공이 어릴 적 반려견의 죽음을 접한 기억부터 어머니의 반복적 자살 시도를 아들로서 겪어나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주인공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와중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지만, 결국 정신적 문제가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의 한켠에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 또한 피하지 않고 마주해 나가기로 용기를 내며 공연의 막이 내린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매체는 어머니의 자살 시도를 막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멋진 것'의 리스트를 만들어 삶의 이유를 찾는 행동이다. 힘들 때마다 멋진 것 리스트는 점점 더 활발히 쌓여간다. 그 '멋진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하나 남은 주차 공간을 찾았을 때,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미소를 지었을 때, 디저트를 본식으로 먹었을 때, 아침에 늦잠을 자기로 마음먹었을 때 등을 포함한다. 

아주 사소한 것들


멋진 것 리스트는 쌓이고 쌓여 공연이 끝날 때엔 하나의 커다란 트레이를 가득 채우는 묵직한 물질성을 띠게 된다. 공연 내내 작은 소품 몇 가지 외에는 물질감 있는 물체가 아무것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트레이는 존재감을 과시하며 공간을 채운다.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순간의 조각들이 모여 아주 멋진 그만의 세상을 만들었단 사실이 눈앞에 그려지고, 무대를 장식한 작은 뜨개 천들이 공연의 주제와 통한다. 


조각들이 이어져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공연 전체의 짜임새와도 연결된다. 일인극이지만 다른 인물이나 소품이 필요할 때, 배우는 관객에게 부탁하여 장면을 같이 만들어나간다. 이 모든 요소들이 관객에게 나름의 주체적 역할과 거기서 오는 적당한 긴장감을 부여하면서도, 지나치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참여형 연극을 아주 많이 본 입장에서, 이 공연의 참여 장치는 정말 '가히 완벽'에 가까웠다. 장면 만들기에 참여하는 관객은 그 장면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디렉션을 받고, 배우는 예의 그 침착함과 호의를 보이며 그들이 민망하지 않게 상황을 조율한다. 참여하는 관객들의 빛나는 눈과 몰입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공연이 이렇게 아름답게 함께 만들어나가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또한 무대 위로 불려 나오지 않더라도 모든 관객은 중간중간 '모든 멋진 것' 목록의 한 부분을 외쳐서 공연을 함께 만든다. 그 '멋진 것'들에 담긴 긍정적 에너지가 무대의 따뜻한 조명과 따뜻한 색감에 따뜻한 에너지를 더한다. 

관객들의 즐거운 표정이 보인다 (출처: https://www.geffenplayhouse.org/shows/every-brilliant-thing/)


이 모든 경험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내 안에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배우의 인종과 관객의 경험 간 상관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난 공연을 예매하면서 주연 배우의 이름과 사진을 보자마자 한국계 미국인일거란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름이 Daniel K. Isaac이란 점에서 한국성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공연 후반, 지나가는 대사에 '난 한국인인데?' (But I'm Korean,)가 있었고, 또 다른 관객의 핸드폰을 소품으로 구하면서 자신은 아이폰이 아닌 삼성폰을 쓴다고 자긍심 있게 말하는 두 부분이 나를 공연에 더욱 깊이 빠지게 했다(물론 대본은 백인이 썼으므로 아마 캐스팅에 맞게 덧붙여진 내용일 것이다 - 실제로 매 공연 배우와 장소에 따라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요청사항이라고 한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은 로비로 나와 각자의 '멋진 것'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일 수 있는데, 준비된 테이블 중 하나에는 한국의 조각보가 깔려있었다. 그 작은 요소가 동양인 관객이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던 그 공간에 위로를 주었다. 이 배우는 자신을 이루는 소중한 한 조각을, 쉬운 공감이나 이해를 바랄 수 없는 공간에 용기 있게 보여주고 있구나. 


일인극은 누가 이야기를 전하느냐가 중요하다. 처음부터 나는 미국인임이 분명한 그에게서 친밀한 한국적 에너지를 느꼈고, 늘 백인 위주로 전개되는 우울증과 자살 이야기에 처음으로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내 머릿속에서 동양인/백인을 나누기도 전에 감정과 느낌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그래서 공연계에서 늘 왈가왈부하는 캐스팅의 문제, 보이는 것의 문제가 가지는 중요성도 되새기게 되고, 다른 인종의 배우가 연기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다른 관객들이 얼마나 어떻게 이 작품에 공감하는 과정을 거쳤을지가 궁금했는데, 워낙 관객 참여적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누구든 어느 정도 개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느꼈던 것 같았다. (늘 공연장을 떠나면서 있는 힘껏 다른 관객의 대화를 엿듣는 편인데,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공연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자살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꼬집는 내용이었는데, 자살 보도가 늘 'commit' 즉 '저지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저지르다'라는 단어는 자살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며,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아남은 상황을 실패라고 표현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자살 보도는 슬픈 일이고, 자살 충동이나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핫라인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의 이름을 적어주는 게 맞다고 했다. 


보면서 내가 작년 이맘때쯤 엘에이에서 보았던, 아니 경험했던 다른 극이 생각났다. <둥지(The Nest)>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방탈출과 이머시브 공연(관객에게 어느 정도 이동의 자유와 참여기회를 제공하는 공연 형태)을 합친 체험형 공연이었다. 한 번에 두 명씩 들어갈 수 있는데, 관객은 한 무연고의 여성의 유품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안내를 맡은 의뢰인 역할 배우는, 집안이 엉망이고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므로, 집에 남은 흔적을 좇아 그녀의 이야기를 알아내라는 미션을 준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 속에서 손전등에 의지해 좁고 낡은 집안을 헤치며 관객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그녀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간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야기 속의 여자는 평범하게 성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아이를 잃고(어떤 일로 잃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혼까지 하게 된다. 결국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둥지> 홍보 사진 (출처: https://www.hatchescapes.com/the-nest)


신선한 체험이었지만 나오면서 나는 어딘지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안에 있던 사진, 테이프 속의 목소리, 대화, 그리고 서사... 정말 백인적이었다. 사실 미국희곡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중산층 백인 가정의 붕괴'라는 소재의 현대판 구현을 보는 것 같았다. 의뢰인이 말했던, '정말 특이한 케이스'이자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는' 사건이라는 말에 무언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할 것이라 기대한 것에 비하면, 누군가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통받은 이야기를 공포/미스터리/스릴러 소재로 소모하는 것에 그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간 조성과 기발한 퍼즐 배치 등 공들인 티가 너무 나는 체험이기에 그 노력이 조금 아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고 누구나 공감받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단순하게 만들었을까? 백인이 늘 이야기하는 아동기 트라우마나 우울증은 어떤 깊이로든 그 소재를 다루기만 하면 누구나 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자살이 가지는 무게를 생각했을 때 이 공연이 관객에게 무엇을 주고 있나(치유? 살아갈 의지? 트라우마의 대면?)를 생각하면 솔직히 조금 무책임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 경험은 내가 한국에서 했던 또 다른 방탈출 체험을 떠올리게 했는데, 독립운동가 테마라고 해서 갔더니 고문실에 갇혀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일이 있었다. 물고문 욕조, 고문의자 등 실제로 사용했던 고문 방식을 그대로 살린 데다 스토리조차 일제로부터 고문을 당하며 그 환영에 시달리는 내용이다 보니, 실제 공포가 덮쳐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친구에게 모든 걸 맡겨야 했었다. 역사적 트라우마, 죽음, 생존, 우울증 등의 주제를 다루는 내게 <둥지>와 고문실 탈출 체험은 너무 현실이었다. 


방탈출과 이머시브 공연은 모두 관객의 참여도가 높기 때문에 새로운 체험을 제공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주로 공포/미스터리/스릴러 장르를 적용하여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한껏 끌어올린다. 많은 방탈출이 살인사건이나 시체를 포함하지만 웬만하면 아주 현실성 없는 세계관(마법세계, 외계인 등)을 활용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그 세계관에 몰입한 경험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신나는 체험이 현실과 겹쳐지는 순간들에서 문득 어떤 불편감이나 찝찝함이 올라온다. 어쩌면 소비하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연은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문다.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플라톤은 공연을 진실에서 두 단계 멀어진 현혹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연이 진실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반박했다. 현혹과 본질이라는 언뜻 보면 극과 극의 가치가 공연에서는 하나로 존재한다. 절제보다는 발산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공연이 현혹을 통해 본질에 닿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모든 멋진 것>은 그 일을 해내고 있다고 보는데, 일인극이라는 단순한 구성을 지녔기에(거기다 저예산이다!) 매 공연, 매 캐스트, 매 무대마다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배우의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는데, 한국계 미국인이 멋지게 그 역할을 해내고 있어서 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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