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리 Mar 07. 2022

사실주의로 <인형의 집> 읽기

사실주의극 가까이 읽기

'연극'과 '희곡,' 무엇이 다를까요?


간단히 말하면 연극은 '보는' 것, 희곡은 '읽는' 것에 중점을 두는 개념입니다.

'연극 읽기'보다는 '희곡 읽기'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희곡은 연극을 문학의 한 형태로 보고 공연을 문학적으로 분석합니다. 대본을 특히 중요한 단서로 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사실주의의 대표극인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희곡적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

사실주의극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인간, 상대적인 도덕 기준, 사회문제를 정면에서 다룸 등이 있죠. <인형의 집>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1. <인형의 집> 줄거리


<인형의 집>은 완벽해 보이는 한 중산층 가정에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담당하던 노라가 결혼과 가정의 허상을 깨닫고 집을 떠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 허상이 유지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노라가 있습니다. 극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하는데요.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는 노라의 모습을 귀여워하는 남편 토르발드를 통해 노라는 천진난만하고 돈을 좋아하는 허영심 많은 젊은 부인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린드 부인이 찾아오고, 두 여자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관객은 노라가 무결점의 가정을 연출하기 위해 남편 몰래 일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큰돈을 빌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토르발드의 자존심을 위해 노라는 이 모든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그의 요양을 위해 지출한 돈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속인 상태입니다.


토르발드는 은행에서 막 승진했고, 노라가 큰돈을 빌려야 했던 이유인 그의 건강 문제도 거의 회복된 상황이기에, 당장은 이들의 가정에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일을 구하러 온 린드 부인에게 토르발드가 자리를 약속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토르발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직원인 크록스테드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린드 부인을 고용하고자 합니다. 이를 알게 된 크록스테드는 노라를 찾아와 자신의 자리를 되돌려놓지 않으면 노라가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그에게 돈을 빌린 사실을 고발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일에 쌓여 있던 돈을 빌린 존재는 크록스테드였고, 노라가 아버지의 임종 이후에 서명을 위조하여 돈을 빌렸기 때문에 크록스테드는 노라의 약점을 가지게 된 것이죠.


크록스테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은행일은 그가 마음을 잡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고자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동아줄 같은 존재였지만, 토르발드는 바르지 않아 보이는 그의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크록스테드가 서명을 위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노라는 크록스테드를 다시 고용해달라고 토르발드에게 부탁해보지만, 토르발드는 악당 크록스테드가 순진한 노라를 위협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이를 거절합니다. 해고된 크록스테드는 모든 일을 폭로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사라지고, 노라는 절망합니다. 이때 노라를 찾아온 린드 부인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크록스테드와 그녀의 인연이 깊기 때문에, 그를 설득하여 우체통 편지를 수거하겠다고요. 린드 부인이 나가고 노라는 시간을 끌기 위해 토르발드 앞에서 미친 듯이 타란텔라 춤을 춥니다.


한편 크록스테드는 과거 린드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녀가 그를 떠났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다시 만난 그에게 린드 부인은 당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해 오해를 풀고,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합니다. 린드 부인은 노라 부부도 이처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편지를 수거하겠다는 크록스테드를 말리고 노라에게도 토르발드와 잘 이야기해보라고 타이릅니다. 노라는 이를 받아들이고 결국 편지는 토르발드의 손에 들어갑니다. 편지를 읽은 토르발드는 크게 분노하여 노라에게 폭언을 퍼붓고 완벽했던 자신의 사회적 체면에 금이 간다는 사실에 그녀를 맹비난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는 크록스테드의 다음 편지를 읽고 금세 태도를 바꾸어 이전의 다정한 남편으로 돌아옵니다.


토르발드의 급변하는 태도를 지켜본 노라는 큰 충격을 받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아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존중받는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인 것인지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토르발드는 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토르발드에게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노라는 그 답을 찾기 전에는 이 집에 있을 수 없다며 짐을 쌉니다. 망연자실한 토르발드는 노라에게 어떻게 하면 그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물어보지만, 노라는 기적 중의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 기적은 "우리 모두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함께 사는 것이 결혼이 될 수 있다면"입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남편을 뒤로하고 집을 떠납니다.




2. 유전과 환경의 영향


그렇다면 이 극에서 나타나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줄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극 초반부터 토르발드는 계속해서 유전의 영향을 경계합니다. 노라의 과도한 지출 습관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라며 장인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종종 드러냅니다.


또한 크록스테드의 해고에 있어서도, 위조를 저지른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거짓말쟁이와 같고,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은 그의 영향 하에 자라기 때문에 문제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열변합니다. 극에는 중간중간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이 대화 이후 노라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 상당히 혼란스러워짐을 볼 수 있습니다. 토르발드의 말대로라면 노라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엄마이기 때문에 그 집을 떠나야만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비도덕성은 환경을 구성하는 마치 전염병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죠. 노라가 집을 떠나는 이유는 이렇듯 유전과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줄거리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닥터 랭크가 있는데요. 그는 이 집에 자주 출입하던 신사로 노라를 진정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인물입니다. 그에 따라 노라도 토르발드 앞에서의 가식적인 모습과는 다른 진솔한 이야기를 랭크와 나누곤 합니다. 극 중에서 랭크는 어떠한 질병으로 인해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병임이 암시됩니다. 역시 어두운 그림자처럼 극 중 세상을 뒤덮고 있는 유전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도덕적 가치의 상대성


<인형의 집>은 선과 악을 불분명하게 그립니다. 처음에는 크록스테드가 악인으로 등장하지만, 알고 보면 노라와 매우 유사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조를 저지르죠. 이렇듯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위조를 하는 것이 과연 무조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지도 이 극이 물음표를 던지는 부분입니다.


크록스테드와 린드 부인은 노라와 토르발드와 대조를 이루는 한 쌍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노라 부부의 허상을 부각해주죠.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본받을 점이 많아 보일지라도 노라 부부는 실상 사회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맺어졌을 뿐입니다. 사회, 경제적 지위가 맞았음은 물론이고 노라가 외모를 가꾸고 성적으로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토르발드 또한 자상하고 헌신적인 남편이라는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인형의 집>에 빠질 수 없는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노라는 왜 집을 떠나야만 할까요? 집을 떠나는 것이 맞는 결정이었을까요?

"기적 중의 기적"은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연 집을 떠남을 통해 노라는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여자들은 결혼의 허상을 깨닫는다고 해서 이렇게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사실적이지 않은' 결말을 밀고 나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인형의 집>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극입니다. 입센의 친구 로라 킬러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인데요. 로라 또한 위독한 남편을 살리고자 부당대출을 합니다. 소설가였던 로라는 돈을 갚기 위해 입센에게 자신의 글을 그가 아는 출판사에 추천해달라고 합니다. 입센은 이를 거절하고, 돈이 없었던 로라는 대출을 갚으려고 수표를 위조합니다. 결국 로라는 잡히게 되고 그녀의 남편은 이혼 후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보냅니다. 2년 후, 남편의 간청에 의해 로라는 남편과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결국에는 유명 작가가 되는 것에 성공합니다. <인형의 집>은 로라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집필된 것으로, 친구의 상황에 나름의 역할이 있었던 입센이 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집시 분장을 한 노라, 극 초반 파란 드레스를 입은 노라, 그리고 타란텔라를 추는 노라입니다. (2019 영국 국립극장, Carrie Cracknell 연출)

(이미지 출처: https://www.huffingtonpost.co.uk/2012/07/10/a-dolls-house-the-young-vic-review_n_1661048.html)


다시 극으로 돌아와 볼게요.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타란텔라 춤을 추기 위해 집시로 변장한 동안 노라는 정말로 '인형'같은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고 난 후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갑자기 수수한 여행복으로 옷을 갈아입죠. 우리는 노라가 인형에서 인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극 내내 '예쁘지 않은' 모습을 싫어하는 토르발드를 존중해 뜨개질과 같은 일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노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고 하는 죽마고우 랭크의 모습에서 이 집에 예쁘지 않은 것은 출입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데요.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노라는 이 집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떠나려는 노라를 남편 토르발드가 붙잡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theatermania.com/new-york-city-theater/reviews/a-dolls-house_67738.html)


그렇다면 노라는 왜 갑자기 결혼의 허상을 깨달았을까요? 편지를 읽은 토르발드의 반응이 촉매가 되었음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따라서 "기적 중의 기적"은 더더군다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죠.


노라는 토르발드에게 자신의 행동을 숨기면서도 언젠가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깊이 감사하고 그녀를 더 존중하고 사랑해 줄 것이라는 "기적"을 꿈꿔 온 것입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토르발드는 그 반대의 행동, 즉 그녀를 존중하기는커녕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하며 그녀를 매도하는 모습을 보이죠. 노라는 자신 나름의 도덕성과 현모양처의 역할에 대한 기준이 있었고, 그에 충실히 살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이 흔들리면서 혼란에 빠지고, 더 이상 어떤 모습으로 자신이 가정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마지막 대화를 보면 이러한 혼란의 기저에는 자신에게도 토르발드와 같은 체면이 있으며 응당 존중받아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토르발드가 종용하는 인형의 집 속 질서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함께 사는 것이 결혼이 될 수 있다면"이라는 "기적 중의 기적"은 결혼 제도에 대한 정면 공격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동등하게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이 결혼 제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니까요.




사실주의극이 당시 사회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성격을 지녔음을 생각했을 때, <인형의 집>이 현대에도 계속 상연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2012년 <인형의 집>을 올린 영국 국립극장의 연출과 배우가 <노라>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를 만들어 현대의 노라를 그렸는데요. 보면서 <인형의 집> 속 노라와 <노라>의 상황을 비교해봅시다. 자막은 제공되지 않지만 장면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CY8s2MqPyM&t=336s

<Nora>


<노라>의 노라는 사회적 자아를 얻었지만 더 이상 아이들을 돌봐줄 유모가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죠. 역시나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가리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는 등 여유로운 겉모습을 연출하고자 뒤에서 힘들게 노력하는 장면들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자아와 가정에서의 자아 모두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라는 자신이 인형의 집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하지만 이에 대한 돌파구 또한 없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이 단편영화는 제목을 <인형의 집>에서 <노라>로 바꾸었는데요. 원작의 제목은 왜 <인형의 집>이었을까요? 여러분의 "인형의 집"은 무엇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실주의는 '사실적인 것'의 추구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