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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Mar 03. 2022

사실주의는 '사실적인 것'의 추구일까?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인간을 그린 사실주의극

여러분은 사실주의극을 어떤 극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적인 것?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는 일루전을 만들어내는 공연?

'현실'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 '현실' 혹은 '사실'은 대체 무엇에 기반한 현실이고 사실일까요?


프로이트와 다윈과 연극, 뭔가 굉장히 안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연극 형태인 사실주의는, 프로이트와 다윈의 연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답니다.


이번 시간에는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이들이 기존 사람들이 생각하던 '사실'의 의미를 혁신적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1. 멜로드라마에서 사실주의로


멜로드라마 기억하시나요? 분명한 선과 악의 대립, 권선징악의 구조, 전형적 인물들, 무대 기술을 활용한 화려한 스펙터클이 특징이었죠.


이러한 권선징악적 구조의 밑바탕에는 옳고 그름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같은 선과 악, 도덕적 가치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절대적 가치이기에 인간이라면 모두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정해진 도덕적 기준을 잘 지키면서 산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못 지켰을 때는 벌이 주어진다는 개념이 멜로드라마가 보여준 세계관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생각을 깨부수고 상대성의 원리를 주장한 것이 다윈과 프로이트입니다. 이들은 막연한 도덕성이라는 개념보다는 과학을 통해 인간 삶 속의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목한 '과학'은 유전과 환경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린 현실은 오감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유전자를 타고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각자 자신이 오감으로 경험한 세계만큼을 알 수 있고, 각각의 인간은 그만큼 다른 생각과 가치 기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주의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이 나름의 상대주의를 추구했지만 여전히 과학이라는 매체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며 원인을 바꾸면 결과 또한 바꿀 수 있다는 인과관계에도 절대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후 등장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비해서 상당히 절대적 가치에 치중한 모습을 지닌다는 점입니다.




2. 사실주의 연극


사실주의는 연극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데요. 몇 가지 특징을 알아보겠습니다.


- 무대 세팅이 매우 세밀하고 꼼꼼합니다.

무대는 등장인물의 생각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주는, "환경"을 드러내는 요소이기 때문에 최대한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관객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적이거나 상징적이기보다는 시청각 등 오감을 통해서 드러나는 직관적인 환경을 의미합니다. 


- 현대 사회 속 병폐들이 극의 주제가 됩니다.

이전 극이 신화나 설화 속 인물을 다루었다면, 사실주의극은 현대인의 삶을 그립니다. 인간 삶 속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은, 사회의 여러 병폐의 원인을 찾아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따라서 가난, 질병, 매춘, 사생아 등이 극의 주제가 되었고, 이는 어두운 내용을 음지에서만 다루던 당시 사회에 큰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공연이 실제로 상연되기보다는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극작가들은 극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극작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편함의 온산인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어두운 주제의 극을 썼습니다. 


가난, 질병, 매춘, 사생아 등의 주제는 주로 백인 중산층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우아하고 풍족한, 말 그대로 금수저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 당시 중산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가난, 질병, 매춘, 사생아 등으로 무너진 가족 사회의 모습이 만연했고, 이것을 대면하고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나온 것이 사실주의극이었죠. 폭로적 성격 때문에 이러한 극들이 사회에 던지는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3. 다윈과 프로이트


그렇다면 다윈과 프로이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실주의극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두 사람은 상대적 가치의 도입을 통해 일종의 지적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때부터 연극이 대중 매체에서 지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영상 등 여러 형태의 대중 유희가 출현하면서 연극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대중 유희로서의 부담을 덜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내용이나 의식 있는 내용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찰스 다윈(1809-1882)

다윈 하면 <종의 기원>과 '적자생존'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진화론변화를 인간 존재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과 도덕적 관념도 상대적이며 비고정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죠. 사회를 더 발전시키며 바꿔나갈 수 있다는 생각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프로이트하면 무의식, 무의식하면 프로이트죠. 프로이트는 사회가 내세우는 공동의 가치는 인간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어쩔 수 없이 동의된 사항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의 자아는 억눌린 상태로 무의식에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이 아닌 그 이면의 단서들(subtext)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유전과 환경이 주 관찰대상이 됩니다. 




4. 헨리크 입센


헨리크 입센(1828-1906)

사실주의극의 대표주자는 노르웨이 극작가인 입센입니다. 입센은 사실주의극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실주의극의 정체성을 형성한 인물입니다. 


입센은 <인형의 집>(1879)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또 다른 유명한 극 <유령>(1881)이 사실주의극의  대표적 면을 간단히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극이 아닌가 합니다.


<유령>은 역시 중산층 백인 가족 이야기를 다루었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유령처럼 이 가족을 따라다니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데요. 극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이 질병은 매독, 즉 성병입니다. 당시 연극은커녕 일상에서도 발언이 거의 금기시되었던 성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심지어 이혼까지 등장하며 사회적 관습으로서 결혼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 극은 당대 사회에 정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인형의 집>과 <유령>에서 입센은 여자 주인공을 통해 결혼제도의 폭력성을 그려냅니다. 당시 입센은 여성에 대해 시대를 앞서는 관념을 지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인형의 집>에 대해 입센이 적은 글을 잠깐 볼까요.


"여성은 현대 사회에서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이 사회는 배타적인 남성의 사회이며 그 법의 제정과 이행 또한 남자들이 도맡아 여성의 행동을 남성적 시각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필자 의역) A woman cannot be herself in the society of the present day, which is an exclusively masculine society, with laws framed by men and with a judicial system that judges feminine conduct from a masculine point of view." 




5.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1856-1950)

노르웨이의 사실주의극을 아일랜드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조지 버나드 쇼입니다. 입센보다는 우리에게 가까운 예시를 들고자 소개해요. 쇼의 가장 유명한 극은 <피그말리온>(1913)인데요. 우리에게는 뮤지컬로 각색된 버전인 <마이 페어 레이디>가 아주 친숙하죠. 1964년에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더 잘 알려졌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거리에서 꽃 파는 하층민 여성이 언어와 매너 교육을 통해 아무도 그녀의 과거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성공적으로 연기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중산층의 고상함과 매너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임을 그림으로써 당시 사회의 기본 틀이었던 수직적 계층 구조 자체를, 그리고 상위 계층일수록 더 행복하다는 개념 또한 뒤흔들죠. 


<피그말리온>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엔딩입니다. 주인공은 사교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지만, 그녀의 선생과 가이드가 기대한 것처럼 매너만이 주입된 수동적 인형으로 머무르기를 거부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진 주인공은 그동안 받은 교육으로 자립 의지와 독립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그녀를 가르친 선생의 지원을 받으며 유사상류층의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그의 집을 나서는 것이 <피그말리온>의 엔딩입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두 인물의 권력관계가 인물의 배치와 구도, 자세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대중성을 위해 연출가들은 쇼의 동의 없이 그동안 주인공을 강압적이고 미숙하게 대한 선생과 주인공이 연인 관계로 발전함을 암시하는 엔딩으로 바꾸어 극을 올립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한술 더 떠 마지막에 주인공을 선생의 슬리퍼를 주워 오는 존재로 각인시키죠.) 이에 쇼는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급기야는 <피그말리온> 이후에 일어났을 일을 글로 요약해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주인공이 선생과 결혼하지 않는 서사입니다. 


Mabou Mines의 <인형의 집> 연출입니다. 저신장 남배우와 장신의 여배우를 캐스팅하여 족쇄와 같은 답답한 결혼제도와 가부장제를 가시화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www.soulamericanactor.com/article03.shtml

입센으로 돌아가자면, <인형의 집>도 이와 상당히 비슷한 사건을 겪습니다. 독일 출판을 앞두고 독일의 편집장은 결론이 독일 정서와 맞지 않는다며, 주인공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는 엔딩을,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을 보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장면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합니다. 입센은 이를 받아들이고 독일 엔딩은 원작과 다르게 출판됩니다. 하지만 입센은 두고두고 이를 후회하며 독일 엔딩에 큰 불만을 표했다고 합니다. 


사실주의극의 정신을 생각하면,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에 묶인 여성이 이를 버리고 떠나야만 여성을 위한 생각을 해나갈 수 있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주제는 여성이 가부장적 틀을 거부하는 엔딩을 통해야 효과적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사회와 대중은 이 결론이 매우 탐탁지 않았고, 극작가들은 엔딩을 놓고 매번 싸워야 하는 지경에 놓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공이 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결론에 익숙합니다. 이를 통해 평온함과 해소감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현실도피적 성격을 거부한 것이 사실주의극의 본질임을 생각하면, 찝찝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 실은 사실주의에 더 걸맞은 것이죠. 


사실주의극을 볼 때 해당 극이 사회에 대해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지, 근거로 드는 유전과 환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엔딩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집중해서 보면 더 풍부한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주의'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오늘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만약 지금의 여러분이 '사실적인' 극을 만든다면, 그 극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내용을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만일 오감이 아닌 다른 요소들이 당신의 현실 세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건 어떤 요소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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