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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박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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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Sep 02. 2024

무제 1

산책 나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사거리에서 실랑이하는 복실한 허스키와 키 큰 노년의 보호자가 있었다 보호자는 절실하게 허스키를 통제하려했고 더 절실한 허스키는 어쩔 줄 몰라하며 제자리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가는 작은 형체가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움직임이 너무 섬뜩했다 거뭇한 털로 뒤덮인 커다란 도마뱀같았다 그 존재는 근처 수풀로 아주 절실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제발 가자고!"와 함께 허스키는 자리를 뜨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번개처럼 움직여 그것을 물고 냅다 사거리 중앙으로 뛰었다 찍찍,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군 그건 아주 작은 다람쥐였다 고개를 든 허스키의 얼굴에 잔인한 살기란 없었다 마침내 다람쥐를 사냥했다는 만족스럽고 해맑은 사랑스런 함박웃음이 박혀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저 다람쥐를 도와야 하나,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내 발걸음은 이미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축 늘어진 하반신을 끌고 절실하게 수풀로 들어가던 다람쥐의 그 기괴한 움직임이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왜 나는 그 처절한 모습에 무서움을 느꼈을까, 분명한 건 시각적으로 너무 충격이었다 잔인한 걸 봤을 때 그건 안일해지는 내 뇌를 각성시키곤 하지만 나를 그 시공간에 매어두고 뒤흔들기도 한다 내가 아니라 시각이 나를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행위가 아닌 목격 즉 시각을 수동적인 감각으로 해석하곤 해 하지만 사실 '그냥 본다'는 것 안에 이미 그 자체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지나가던 사람의 발걸음을 붙들어매고 못움직이게 하고 그를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시키지 그리고 하염없이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해, 라고 영화학자는 말했다

카페에서 종이 빨대를 찾을 때 우리는 한 거북이의 콧구멍에서 피와 함께 플라스틱 빨대가 힘겹게 빠져나오던 장면을 떠올린다 거북이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더 전에는 하얀 새끼 물개 바로 옆에서 몽둥이로 엄마 물개의 머리를 때려 죽이던 인간의 영상이 떠돌았다 물개가죽 불매운동의 일환이었는데 그게 수익을 위해 조작된 이야기들이었단 걸, 있지도 않은 하얀 물개 멸종 위기를 지지하는 순간 우리는  아메리카원주민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단 걸 대학원에 와서야 알았다

나는 아직도 그 영상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다람쥐의 모습도 더해졌다 무엇이었을까 그 허스키는 당장 다람쥐를 사냥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실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일까 호랑이를 떠올리게 하는 내 고양이들의 움직임이 그저 작기 때문에, 귀엽다 말하며 나를 한 번 깨물고 할퀼 때 서운해하는 나는 뭘까 늘 죽음과 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쓰지만 우리는 절대로 죽음과 폭력에 대비할 수 없다 휘둘려버린다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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