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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Aug 28. 2016

스마트폰을 뺏은 선생님을  고소합니다.

아드님을 좀 야단쳐도 되겠습니까?

수업을 위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수거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수업에 방해되니까. 상식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굳이 학교 규칙과 재량권을 인정하고 안 하고 떠나서. 스마트폰에 중독되었건 안되었건 학교에 왔으면 대부분의 학교는 학생들로부터 스마타폰을 제출받아 보관한다. 그리고 하교시간에 맞춰 다시 돌려받는다. 작가도 부모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긴급한 경우에는 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까.


사진출처 : 경남도민일보


그런데 얼마전, 내가 담당하고 있는 학교 학생으로부터 점심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지. 잘 기억이 안나는 이름이다. 1학년인 것 같은데. 자기소개도 생략. 인사도 생략. 본론부터 툭~ 튀어나왔다. 다급했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경찰 선생님"
"그래. 무슨 일이지? "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 휴대폰을 뺏을 수 있나요? 불법 아닌가요? 저 선생님 고소하고 싶어요."
"그래, 선생님이 잘못한 게 뭐길래?"
"아니 왜 학교에서 선생님이 마음대로 휴대폰을 뺏는 거예요? 저 여자 친구한테 중요한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저와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에 선생님을 고소한다고?"
"네, 저 진짜 여자 친구한테 전화받아야 하거든요."
"이름이 뭐지?"
"조**인데요."
"너는 지금 당장 위클래스 아저씨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고 아버님 연락처 문자로 보내~ 지금 학교 갈 테니까."


사진출처 : 라이브캔버스


선생님이 자기 휴대폰을 강제로 수거했다고 선생님을 고소하겠단다. 그리고 휴대폰을 제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자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기로 했단다. 달리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너무도 태연하게 주절주절 해대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여자 친구 때문에 선생님을 고소하겠다는 말을 경찰관에게 태연하게 할 정도라면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놔두면 정말 학생의 인성이 '쓰레기'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님 되시죠?"
"네. 누구십니까?"
"아, 저는 아드님이 다니는 학교 담당 경찰관입니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사고를 쳤나요?"
"아버님, 지금 제가 아드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는 데 자기 여자 친구한테 전화를 받아야 한다면서 휴대폰을 가져간 선생님을 고소하겠다고 제게 신고를 했습니다. 이놈 제가 야단을 좀 쳐도 되겠습니까?"
"네? 안 그래도 제가 그놈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집에서도 지 엄마한테 대들고, 엄마 지갑에서 돈도 함부로 가져가고 제가 때려도 안되니 이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가 이 놈 버릇 좀 가르치겠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쓰레기 되지 않겠습니까?"
"경찰관님이 이 놈 사람 좀 만들어 주십시오. 때려도 상관 안 할 테니까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아버님의 말투에는 질렸다는 느낌이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부모 속을 속였는지는 구차하게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간다. 중요한 건 이대로 놔두면 몇 년 뒤 뉴스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 있을 것 같아 솔직히 그게 더 걱정이 됐다. 이 참에 사람 만들어야지.


사진출처 chosun.com



학교를 찾아가서 먼저 학생 안전부에 들렀다. 선생님께 학생의 신고 경위를 설명하고 또 아버님과의 통화내용도 설명드렸다. 때려도 좋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강조해서까지 말씀드리고 상담실로 향했다. 상담실에서 만난 학생은 아는 친구가 아니다. 한두 번 학교에서 마주친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학교에서 이 친구에게 목례 인사를 받아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네가 여자 친구 전화받고 싶어서 선생님을 고소하겠다고 했어?"
"네."

.

.

.

"세수하고 와."
"네."


글보다는 꽤 긴 시간을 상담했다. 학생은 나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진짜 크게 야단을 맞았다.  


"잘못한 거 말해봐?"
"선생님을 고소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게 잘못입니다."
"너 쓰레기야?"
"아닙니다."
"그럼, 쓰레기 되고 싶어 막 미치겠어?"
"잘못했습니다."
"너, 어제 엄마한테 용돈 안 준다고 욕설한 거 있어 없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상담 후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드님 오늘부터 달라질 겁니다. 그 한마디 해드리고 아버님의 하소연을 10배 되는 분량을 듣고서 전화를 끊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시작 지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현재 시점에서, 아이의 잘못만 보고 마음 태운다.


이번 글의 주제는,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수거해도 되느냐 안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난 해 영국 BBC와 CNN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수거한 학교가 안한 학교보다 성적이 꽤 많이 올랐다는 기사를 본적은 있다. 학교의 재량에 따라 수거를 하는 학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교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스마트폰의 수거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스마트폰을 수거한 선생님을 고소하겠다는 학생의 인성에 대한 문제를 꼬집고 싶었다.


 

결국, 학생 인성의 바른 길은 부모님의 역할이 크다. 걷잡을 수 없게되는 현상이 오더라도 그건 안타깝지만 부의 역할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행동은 언제나 변화를 거쳐서 도달하지, 한 번에 '쓰레기'가 되는 친구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의 변화에는 단계라는 게 있고, 여러 단계가 있다 보니 앞 단계를 놓쳤다면 다음 단계만이라도 고쳐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고치는 과정에도 잘못된 단계 만큼의 계단이 있다. 결국, 버티고 기다리는 시간을 얼마나 감당하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자식들이니까. 못할 건 없지 않은가?


오늘, 학교에서 그 학생을 다시 만났다. 멀리서 뛰어와 인사를 한다. 고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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