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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Apr 21. 2017

나를 울렸던 소심한 여학생의 용기

이야기가 끝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17년, 18년, 19년을 살아오면서 이 무대에 올라와 5분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5분이 아니라 50분 아니 5시간을 줄줄이 이야기해도 모자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왜 우리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 이야기의 청중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자, 지금 무대를 여러분들께 드리겠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여기 있는 800여 명의 전교생 앞에서  해줄 주인공은 나와주세요. 3학년 중에 없습니까? 그럼 2학년 중에는요? 마지막 1학년 중에서 용기 내어 이 무대에서 자기 이야기를 해줄 친구 없습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무대는 또 다른 공기로 채워진다는 느낌? 정적이 흐르다가 박수가 쏟아져 나왔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면 정적이 흘렀다. 1시간을 연신 액티브하게 강연을 하다 잠시 1분 광고가 나와야 하는 타이밍인가 싶은 생각도 순간 들었지만 도대체 이 학생은 무대 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레 말을 던졌다.

.


특강은 즐거워야 한다.

적어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은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으면 학습 이전 단계에서 습득하겠다는 자세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물론 강연의 주목적은 팩트의 전달. 청소년들의 정서에 맞는 레이아웃으로 강의자료를 꾸미고 추임새와 제스처로 강연의 흥을 돋우는 것이 나의 강연 스타일이다. 



오늘 강연은 1년 만에 찾은 인천 유명 특성화고. 원래의 강연 시간은 50분이었지만 학생들의 열띤 분위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교감선생님의 강연 연장 제스처를 확인하고 강연은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대부분은 쉬는 시간을 주던지 아니면 강의 시간을 50분으로 나누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 강의는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자동 연장이 되었다. 학교에서도 다음 수업이 있지만 열정적인 리액션으로 가득 찬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의 강의는 교감선생님의 수신호로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강연을 한 지 1시간을 넘길 무렵,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다섯 가지 용기'라는 주제를 펼쳐놓고 나는 힘차게 외쳤다. 나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가져볼 용기.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결단을 보여줄 학생을 찾고 있었다. 800여 명의 전교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실제 '저요'하고 선뜻 나오는 학생은 없었다. 1층에 자리한 1, 2학년을 향해서 소리를 외치고 이어서 2층에 앉아있던 3학년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드디어 3학년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시간은 5분이었고, 주제는 없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여학생은 무대 정중앙으로 위치를 잡고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열심히 공부해서 고객들에게 가족 같은 은행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내용이 유독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떨림이 없는 목소리에서 이 친구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대에 올라와 800여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다. 결국 나는 그 용기를 보고 싶었고 그 용기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지를 직접 체감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3학년 그 학생은 왜소한 외모와는 다르게 큰 거인처럼 나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전교생의 박수를 받으며 3학년 여학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외쳤다. 이제는 2학년 중에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8년을 살면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용기 있게 해줄 친구가 있으면 나와달라고. 그럼 이 무대는 바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머뭇거리는 학생들은 많이 있었지만 선뜻 앞으로 나오겠다는 모습을 보이는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강연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2학년이 모여 앉아 있는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요"


검은 뿔테 안경에 밴드로 긴 머리를 묶은 여학생이었다. 교복을 단아하게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표정을 보아서는 이런 용기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생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마이크를 건네받는 손이 떨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댔다.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따 때문에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병도 생겼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누구를 찾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의 성격은 소심하게 변해갔고 그런대로 잘 견디며 여기 학교로 왔습니다. 제가 지금 용기를 내어 여기 무대에 선 이유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올라왔습니다. 왕따를 당했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여기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내가 해보지 못한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많이 떨립니다. 제 모습이 어떨지 조금 올라온 게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을 더 이상 후회하며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이 내려가고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면 울컥거리는 목소리가 들킬 것만 같아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1분이 지났을까? 나는 전교생들에게 부탁했다. 방금 용기를 내어준 학생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달라고. 전교생들은 거침없는 박수를 보내주었고 몇몇 학생들은 일어나서 갈채를 보내주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여학생은 자기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엉뚱한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지금까지 거의 5년 동안 2만여 명이 넘는 학생들을 강의하면서 나를 울린 학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방금 나는 눈물 테러를 당했다. 아주 기분 좋은 눈물 테러.  


영화에서나 보았고, 유튜브에서나 보았던 감동의 순간을 나는 방금 목격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청소년을 만나는 동안 이 순간이 나에게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전에도 확고했지만 오늘 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여전히 청소년을 위한 활동에 미쳐도 되는 이유.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었지만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교감선생님께서도 같이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방금 감동을 안겨준 학생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달 학교의 주인공으로 자기소개를 해 준 두 명의 학생을 선정해서 오늘의 용기가 정말 값진 용기였고 다른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고맙습니다. 교감선생님.


무엇이 여학생으로 하여금 무대로 올라오게 만들었을까? 직접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간절함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절박함. 그리고 행복하고 싶은 갈망까지. 


올해 들어 10여 차례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스스로 나와 자기 이야기를 하는 학생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실 이 것은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은 무대다. 말은 쉽게 할 수 있겠지만 800여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소개를 첫 번째 했던 3학년 여학생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가 나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이후부터는 더 열심히 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떨리기도 했지만 막상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무언가 느낄 수 없었던 자긍심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했다.  


강의가 끝나자 아이들은 제각각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감동을 주었던 여학생의 모습도 보았다. 여학생의 주변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달라붙어 함께 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하루 이 학생은 어떤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일과가 끝나면 한 숨을 돌리고 

나는 감동을 주었던 그 학생에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이다. "용기를 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 줄 것이다. "넌 틀리지 않았다."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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