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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Apr 07. 2020

작별에 관하여

네덜란드의 장례식 모습

지금은 남편인 M과 데이트 하던 무렵, M은 아버지의 여자친구께서 돌아가셨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해오셨고, 결국 오랜 시간동안 여러 의사들과 상담을 거친 끝에 안락사를 택하셨다고. 그리고 안락사 전날 손수 '이별 파티'를 열어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고. M은 그 작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그 작별의 과정이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주었는지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이 빨개진 M을 보며 나는 그의 곱고 여린 마음을 느꼈다.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부터 진심으로 M에게 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느 문화권이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간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 죽음을 더디게 맞이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는 기술을 연마하고 의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결국 피할 수는 없는 마지막은 언젠가 반드시 다가온다.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그 태도의 차이는 각 문화마다 다르다. 오늘은 내가 경험했던 네덜란드의 한 장례식에 대해 글을 쓰려 한다.


Lilies, 2020, illustration by Min van der Plus


M의 외할아버지 퍼디 Ferdy 는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M과 함께 두 번 정도 요양원에 병문안을 갔었고, 뵐 때마다 약해지는 호흡과 기색에 마음이 아팠다. M의 가족들은 모두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몇 번의 호흡곤란과 고열이 오고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무렵, M은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2019년 10월 이었다.


남은 가족들이 며칠 간 가족회의를 거쳐 장례식을 준비하는데, 고인이 돌아가신 날 부터 일주일 이내에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고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 네덜란드의 많은 사람들은 장례보험에 들어있고, 유가족들은 보험에서 보장하는 것을 토대로 추가할 것은 추가해가며 장례를 준비한다. M은 가족회의를 위해 며칠간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고 림버그Limburg 로 갔다.

M의 가족들은 퍼디의 장례식을 지인들에게 안내하는 카드를 발송하고 신문에 부고를 냈다. 3일장, 5일장을 치루며 빈소에 유가족이 상주하는 한국의 장례식과 달리, 네덜란드의 장례식은 단 하루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에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


장례식 날 아침. 그 전 날 림버그에 도착했던 나와 M은 M의 형과 함께 퍼디의 요양원으로 갔다. 가족들이 모두 퍼디가 썼던 방 바깥에 보여있었다. 방 안에 들어가니 M의 어머니와 이모가 이미 퍼디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퍼디의 몸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평온해보였다. 퍼디에게 나 역시 작별인사를 건네고, 조금 뒤 우리들은 방 밖으로 나가야 했다. 장례 안내사들이 관을 가져와 퍼디의 몸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관이 나오길 기다리며 가족들은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가벼운 대화로, 때로는 숨 죽인 울음으로 짧지만 긴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관이 방 밖으로 나오고, 운구차에 실렸다.


Ferdy의 장례식은 Geleen의 한 화장터에서 진행되었다.

Nedermaas in Geleen, photo from dela.nl(https://www.dela.nl/uitvaartlocaties/crematorium-uitvaartce)


화장터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낮은 벽돌 빌딩과 어우러진 풀밭과 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터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면 예쁜 공원 안의 미술관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Nedermaas in Geleen, photo from dela.nl(https://www.dela.nl/uitvaartlocaties/crematorium-uitvaartce)


장례식이 진행되기 전, 가족들은 모두 다과가 준비된 가족 전용 공간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 공간은 오직 고인의 가족들만 사용할 수 있다. 장례식동안 혹시라도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상황에 고인의 가족은 이곳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식이 시작되기 15분 전, 본 식장이 열리기 전 조문객들이 대기하는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가족 공간에서 대기 공간으로 나가 조문객들을 맞이한다. 조문객을 맞이할 심적인 여유가 없는 가족은 계속 가족 공간에 머물러도 괜찮지만, 대부분은 조문객들에게 와주어서 감사하단 인사를 건넨다. 조의금은 예의가 아니기에 결코 오가지 않는다.


그리고 본 장례식장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Nedermaas in Geleen, photo from dela.nl(https://www.dela.nl/uitvaartlocaties/crematorium-uitvaartce)


퍼디는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에 식을 진행한 사람은 목사였다. 하지만 반드시 목사가 진행하지 않아도 된다. M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장례식은 고인의 종교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그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거의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대부분의 장례식들은 장례식 중에 고인의 사진을 보여주고, 고인이 좋아했던 노래를 틀고, 고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각자 단상에 나와 고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거나 시를 읊는다고 한다.

퍼디의 장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네덜란드어 실력은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준이 되지 못했지만,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농담섞인 고인의 에피소드를 말하면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는 와중에도 웃었다. 퍼디를 사랑한 많은 사람들이 퍼디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나누고, 또는 전혀 몰랐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인을 추억하였다. 퍼디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가족과 친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스크린에 흘러갈 때, 나 역시 병상에서 만난 퍼디가 아니라 87년간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퍼디를 만날 수 있었다.

식이 끝나면 조문객들이 관 앞으로 한 사람씩 걸어와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넨다.


장례식장을 나와서 퍼디의 아내이자 M의 외할머니인 엘리Ellie가 묻힌 묘지로 향했다. 퍼디의 관은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의 옆에 안치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묘지 옆에 마련된 커피테이블 koffietafel 로 걸어갔다. 네덜란드의 장례식은 항상 커피테이블로 마무리가 되는데, 조문객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다과가 마련되어 있다. 조문객들은 한두시간 동안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퍼디의 장례식은 오후 5시 쯤 마무리되었고, 나와 M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 주제로 글을 쓰기 전 리서치를 하면서 네덜란드에 이민 온 이탈리아 사람이 네덜란드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읽었다. (https://www.danielebesana.com/blog/amsterdam/big-fat-dutch-funeral)

'얼마나 구슬프게 애도를 하느냐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인 이탈리아 문화권에서 자랐다'는 구절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다. 한국의 장례 문화에 곡(哭)이 함께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 하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의 장례식에 곡소리는 없었다. 슬픔의 부재가 결코 아니다. 슬픔의 결이 달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격한 슬픔에 잠겨있기 보다, 고인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진정 남아있는 사람들이 간직해야할 것이 아닌가 다시한번 일깨워 주는 담담한 애수가 장례식 내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의 장례식 절차의 여유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장례식을 한국에서 두 번 치루었던 나는 한국의 장례문화가 유가족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3일장, 5일장을 번잡한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루는 동안 타인과의 거리감이 너무나 좁아서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바로 옆 방 빈소에서 타인의 가족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고, 화장실에 갈 때도 타인과 마주치고, 이틀동안 병원 장례식장의 방 한켠에서 선잠을 자며 언제 올지 모르는 조문객들을 맞이해야 했던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작 할머니들을 추억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 나는 너무나 아쉬웠다.


나는 네덜란드인들의 Gezellig함이 장례식 문화에서도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최대한 Gezellig 하게, 안락하게, 유족들과 고인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태도가 나에겐 정말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직도 한 중년의 남성이 퍼디의 관을 주먹으로 톡톡 치고 미소지은 후 걸어나가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한 인간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애정어린 동시에 선선한 그 모습이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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