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험상궂은 날씨에 대해.
풍차의 나라.
낭만적으로 들린다. 튤립밭 한 가운데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풍차가 여유롭게 돌아가며, 새들은 귀엽게 지저귀겠지. 바로 이 사진처럼 말이다.
네덜란드에 살기 전까지, 유럽의 자연이나 날씨에 대해 내가 가졌던 환상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만화영화나 동화책에 나오는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비밀의 화원, 마녀배달부 키키 등. 녹음이 우거지고 햇살이 찬란한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지는 그 작품들을 보며 나는 유럽의 날씨가 일년 내내 천국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배낭여행으로 여름에 잠깐 겪었던 서유럽-남유럽의 날씨는 나의 이 편견에 힘을 보태주었다. 평생 한국 여름의 습도에 유독 약했던 나는 유럽의 건조한 여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네덜란드에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을때도 언어나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만 있었지, 날씨에 대한 걱정은 1그램도 없었다.
정말 어리석었다.
애초에 왜 풍차가 많은 나라인지 생각 해 보았어야 했다.
낭만적이라서가 아니다. 그만큼 풍력 발전에 유리한 환경이라는 뜻이다.
일년의 평균 풍속이 20-26km/h인 나라이다. (한국은 15km/h 정도 된다.)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평균 풍속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다가 바람에 밀려서 길에 쓰러진 적도 있다. 이런 날도 현지인들에겐 그저 '평균보다 약간 바람이 센' 날일 뿐이다. 억센 사람들.
대다수 한국 여행객들은 성수기인 6월-8월까지 유럽땅을 밟기에 아마 북서유럽의 날씨가 9월 이후로 어떻게 바뀌는지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개인적인 서러움을 약간 담아서 날씨에 대한 썰을 풀어보기로 한다.
이 사진은 2018년 8월 말에 헤이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찍었다. 아직 한창 여름이어야 할 시기다. 저 사람이 왜 패딩의 모자를 뒤집어 썼을까? 바람과 함께 비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뒷쪽의 깃발들이 펄럭이는 것이 보이는가? 거친 풍속을 보여주고 있다. 빗방울이 예리한 각도로 사람의 얼굴에 몰아쳐오고 있기에 뒤돌아 서 있는 것이다. (참고로 저 깃발들은 네덜란드의 각 주 별 깃발들.)
네덜란드의 일년 날씨는 비-비-비-비-비-비-햇살잠깐-비-비-비-비-비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심지어 하루 단위의 날씨에도 일관성도 없어서, 24시간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buienradar 라는 강우예측 레이더 앱을 대부분 핸드폰에 깔고 다닌다. 날씨가 가장 좋은 6월에서 8월 까지도 언제 소나기가 내릴지 알 수 없다. 북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나 영국의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들을 보면 유독 구름에 대한 테마가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소재로서 제일 눈에 잘 띄는것이 구름들이다. 게다가 구름의 이동 속도가 워낙 빨라서 자연 다큐멘터리의 4배속 화면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것 같다.
여름에 이렇게 구름이 가득한 맑은 날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긴 하다. 워낙 산이 없는 수평적인 풍경이라 구름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네덜란드에 살면서 하늘의 색채, 공기의 광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여름은 해가 떠있는 시간도 길어서, 오전 6시 부터 밤 11시까지 밝은 하늘에 물든 아름다운 구름의 무리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여름에도 바람은 여전하다. Texel 섬에서 찍은 저 사진도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숨도 쉬어지지 않는 바람을 맞아가며 찍은 것이다. 모래가 살에 화살처럼 박히는 느낌을 아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uitwaaien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바람이 미친듯이 불 때 걷는' 행위를 묘사한다. 이 나라의 바람에 익숙하지 않는 나와, 다른 나라 출신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더치 친구들도 모두 바람이 불때 해변을 걷거나 공원을 걷는 것을 매우 즐겼다. 기분이 신선해 진다고 한다. 나는 바람 때문에 머리가 산발이 되고 호흡이 곤란할 지경인데, 더치들은 refreshing 된다고 좋다하는 모습이 신기할 때가 많다.
아름답고 짧고 덧없는 여름이 지나가고, 9월 중순부터 날씨는 예고 없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이후 3월까지 장장 6개월 간 (혹은 그 이상) 흐리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일조량도 짧아진다. 가뜩이나 흐린데, 해가 오전 9시에 뜨고 오후 4시에 진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6개월은 겪어보지 않으면 그 느낌을 모른다. 6개월간 계속, 이 비디오와 같은 날씨가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의외로 눈은 오지 않는다. 온도로만 보자면 한국이 더 춥다. 하지만 우울감은 비교도 할 수 없다. 2018년 11월에서 2월까지, 해가 비친 날은 단 6일에 불과했다. 2013년에 처음 네덜란드에 와서 동급생인 덴마크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비타민 D를 반드시 섭취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처음에 농담인가 싶었다. 그 이후에 암스테르담에서 3년을 살았던 한국 친구가 시금치와 연어를 꼭 먹고 비타민 D를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고 했을때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딱 2년 후 나도 병원에서 비타민 D 처방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여기가 이런데 스웨덴이나 핀란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괜히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밝고 화사한 색채가 많이 들어간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정신 건강을 위한 방편일 것이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자면 여기에 살면서 한국에서의 생활태도와 달라진 것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나치게 외적으로 치장하는데 확실히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일단 겨울에는 메이크업을 덜 하게 된다. 어차피 비에 씻겨 내려가기 때문에 화장을 하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캐시미어같은 비싼 재질로 만들어진 코트나, 스웨이드 재질의 신발, 양가죽 가방 같은 아이템들은 한국에 고이 모셔놓고 왔다. 네덜란드에서는 날씨 때문에 너무나 허무하게 망가진다. 우산은 소용이 없다. 바람이 360도 방향으로 손오공 마냥 날뛰며 우산의 척추를 고이 접어버린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유럽 안에서도 '검소하고 캐주얼한' 패션으로 소문이 나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가는 것 같다.
이제사 생각하는 것은, 괜히 북서유럽에 겨울 명절이 많은게 아니구나 싶다. 너무 우울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축제를 만들어서 즐겨야 했던 것 아닐까. 네덜란드에는 전통적으로 신터클라스 축제 (Sinterklaasfeest)가 있고, 요즘은 크리스마스도 즐기고, 새해맞이도 워낙 요란스럽게 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다.
어쨌든 여기도 긴 겨울이 끝나 4월이 되었고, 요즘들어 햇살 좋은 날이 점점 잦아지는 것을 체감한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비록 반가운 햇빛을 집 안에서만 즐기고 있지만, 그래도 이나마의 햇빛에도 언제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