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
2021.01.08 말씀묵상
[요4:7-9]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 중,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려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마치 그녀를 만나기로 예정하신 것처럼, 그 곳에서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곳에 물을 길으러 왔지만, 그리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셨지만, 그녀는 줄곧 자기가 찾던 삶의 의문을 해결할 메시아를 알아볼 눈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통념상 유대남성이었던 예수님에게 말을 붙일 수 조차 없었다. 모든 걸 시작하신건 바로 예수님 쪽에서 부터다.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선택이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마음먹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는데도 죄많은 육체의 인생에게는 정말 오랜시간이 걸린다. 진리는 밝은 곳에 걸려있는데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든다. 그만큼 내 인생은 어둡다는 반증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다. 계급주의가 사라진 현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일까? 놀랍게도 그렇다. 더 많은 부분에서 차별과 혐오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렇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자기가 혐오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싶어한다. 이 말씀이 나에게 큰 찔림이 되는 이유도 그러했다. 나는 이미 나의 가정에서부터 아주 큰 연약함을 품고있었다. 늘 잔소리로 나를 괴롭히는 아버지가 싫었다. 혼자 생활할 능력이 되지않아서 늘 도움을 구하는 누나가 싫었다.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려니 최대한 부딪치지 않게 피했다. 이 말은 어투만 조금 다를 뿐 본질상 파헤쳐들어가보면 사마리아인을 배척한 유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죄를 범하고 있을 때는 놀랍게도 그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인색해졌다. 도리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 신앙이라는 건 왜 내 삶의 뒤를 쫓아 따라다니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이상한 낙인을 찍는 것인가 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적반하장이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를 기억하시고 그 길을 통과하시지 않았다면 구원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말씀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서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으셨다면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씀으로 늘 찔림으로 나에게 다가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마음으로 가족들을 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나에게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나는 늘 내가 먼저 은혜받은 자로서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모든 말씀들이 내 삶에 부담을 하나 둘, 계속해서 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누적된 짐들이 나에게 버겁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모든 관계들을 단절하고 싶었다. 혼자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시는 순간, 내 주변의 시야가 들어왔다. 내가 베풀어야하는 관계들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에게 호흡처럼 베풀어지던 은혜들을 보았다.
나를 계속해서 신경쓰고 챙겨주는 아버지의 모습과, 나를 필요로하고 나와 좋은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누나의 모습.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마리아여자를 증오하듯 관계의 단절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의로움 속에서 길을 헤맸다. 깨닫는다. 내 죄 때문에 나에게 베풀어진 사랑들을 더럽혀왔음을. 상한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의 긍휼어린 마음을 배운다. 사마리아를 거쳐가는 것, 아니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며 속으로 자기가 평생에 걸쳐 무엇을 구했는지도 까먹어가는 불쌍한 인생에게 먼저 마음을 여는 한마디를 하신 주님. 그리고 새생명을 일깨우는 사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신 주님을 본다. 친구의 집이 오리 길이면 십리를 동행해주라는 주님의 체휼을 배운다.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나는 요즘 그런 주님의 지속적인 말씀에 조금은 응답한느 삶을 살고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삶을 살게해주심에 감사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늘 귀찮고 짜증나게만 들렸는데, 먼저 순종하려고 하는 태도를 갖게 해주신 것.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도리어 먼저 관심을 갖고 대화를 시도하는 그런 모습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들을 깊이 생각하며 존경하게 되는 그런 변화들. 그저 감사하다. 그리고 늘 마음에 짐처럼 무거었던 누나와도 막혔던 소통이 뚫리는 은혜가 있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유없이 누나를 증오하고 혐오했던 나의 옛사람에게서 조금 멀어져 하나님의 걸음을 걷게 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다. 삶이라는 건 살아갈수록, 죄로 가려진 오해들을 풀면서 내가 얼마나 과분한 은혜를 받았었는지 깨닫는 과정이다.
내 앞의 숱한 사마리아들을 못본체 지나치지 않도록 나를 항상 말씀으로 쿡 찔러 깨우시는 예수님의 미쁘신 관심에 늘 감사하다. 도망치면서 늘 속으로는 짓눌린 마음이 가득했었는데. 이런 연약한 나를 지켜보시면서 얼마나 중보하셨을까 싶다. 내가 더 성숙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은혜들이 값싸게 여겨짐을 받지 않도록, 감사한 하루하루를 주님께 올려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