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혼돈으로 점철된 소용돌이 속에서 방랑하는 날개 없는 새, 아비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예로부터 새는 자유를 상징해 왔다. 두 날개로 어디로든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광활한 하늘을 누비며 사는 새들은 뭇사람들의 부러움과 갈망의 대상이었다. 현실의 무수한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고 종의 한계를 뛰어넘고 초월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는 존재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염원과 현실을 초월해 이상향에 닿고자 하는 열망은 어느 부분에서는 본능적인 것이다. 자유롭다해서 무조건적으로 행복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인간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권리다.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반항이다.
비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나 자신이 온전히 소유한 불가침의 권리다.
행복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격은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 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하지만 새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새는 처음부터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아비정전>은 1990년 왕가위 감독이 2번째로 연출한 장편영화이다. 지금까지도 유명한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양조위, 유덕화, 장학우 등이 어벤저스처럼 모인 영화이며 당시 인기 있었던 누아르 장르가 아닌 전체적으로 어둡고 물에 가라앉은 듯한 서정적인 멜로 영화에서 청춘의 비애를 연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구조적으로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주인공 아비(장국영)가 축구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소려진(장만옥)을 매일 콜라를 사러 와 유혹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때 아비가 소려진을 꼬시는 장면들이 유명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아비가 했던 말이 있다.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대사이기도 하다.
1960년 4월 16일 세 시 일 분 전. 그 순간 당신은 나와 함께 있었어요. 당신 덕분에 난 그 일 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군요. 지금부터 우린 친구예요. 이건 당신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시간이니까.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이어서 엔딩장면과도 일치하는 필리핀의 밀림 장면이 나오며 노래가 흘러나온다. 영화는 처음부터 보여준다. 주인공인 아비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아비가 독백으로 이야기하던 발 없는 새는 아비 자신이었다.
1부의 내용은 그대로 소려진이 아비에게 운명적으로 이끌려 동거하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어느 날 아비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 후 침대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소려진은 아비에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아비는 반대한다. 관계의 발전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아비의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에 실망한 소려진은 그대로 집을 떠나고 영화는 소려진과의 이야기인 1부에서 2부로 넘어간다.
2부는 아비의 양어머니를 상처 준 남자에게 보복하러 갔다 우연히 만나게 된 댄서 루루(유가령)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아비는 또다시 소려진처럼 루루를 유혹하고 그 사이 소려진은 아비가 말했던 그 1분을 잊을 수 없어 아비를 다시 찾아온다.
아비의 양어머니는 아비에게 친어머니 이야기를 해주다가 그제야 자신이 아비를 잃기 싫어한다는 것을 말하는 도중에 깨닫고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비는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에 대해 알고자 하고 지금껏 자신을 키워준 양어머니와 마찰이 잦아지게 된다. 또한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루루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고 매일 아비의 집 근처를 서성거리는 소려진은 근처를 순찰하던 경관(유덕화)과의 소소한 산책으로 위로를 받게 되고 상처를 점차 치유해 나간다. 소려진은 아비를 추억하며 경관에게 말한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경관은 소려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신의 순찰로에 있는 전화부스에서 매일 이 시간에 기다릴 테니 전화하라고 말하고 매일 그 시간만 되면 그 부스 근처에서 서성이지만 그녀에게서 연락은 끝내 오지 않고 혼자서 홀어머니를 돌보다 곧 돌아가시게 되자 원래 자신의 꿈인 선원이 되러 홍콩을 떠난다. 그가 떠난 후 텅 빈 거리의 전화부스에서는 갈 곳 없는 쓸쓸한 전화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루루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던 아비는 양어머니가 곧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는다. 떠나기 전 양어머니는 아비에게 친어머니의 소재를 알려주고 그 길로 아비는 곧바로 무작정 필리핀으로 향하고 영화는 3부로 넘어간다.
떠나기 전 아비는 친구에게 아끼던 차를 넘긴다. 친구는 루루에게 작업을 걸지만 루루는 아비만을 사랑할 뿐 그에겐 마음이 없고 친구는 상처를 받고 루루를 폭행한다. 루루에게 아비가 필리핀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차를 처분하고 받은 돈을 넘겨준다.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일방통행인 짝사랑이지만 아비를 만날 기회가 될 돈을 루루에게 건네주고 언제든 기다릴 테니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렇게 루루도 필리핀으로 떠나고 그 사이 필리핀에 도착한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친어머니는 아비를 만나주지 않는다. 친어머니가 몰래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지만 아비는 돌아가는 길에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술에 취해 가진 돈을 전부 도둑맞은 아비는 거리에서 방황하던 중 선원이 된 경관이 발견하여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다. 위조여권을 계기로 우연히 둘은 필리핀 갱단과의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고 아비는 그들을 피해 도망친 열차에서 총을 맞고 경관과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을 되돌아보며 영화의 첫 장면인 밀림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한다. 이어 엔딩으로 뜬금없이 양조위가 집에서 짐을 챙기고 나서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아비라는 뜻은 광둥어로 망나니, 불량배를 뜻하고 한국어로는 양아치 정도가 되겠다. 한자 자체로 직역하면 날 비(飛)의 '나는 존재'이다. 앞서 아비가 말한 죽을 때만 땅에 내려올 수 있는 발 없는 죽은 새, 그것이 아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죽었을 때에만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지만 이미 죽어 있다면?
아비는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 날아다니며 방황하는 청춘을 대표한다.
영화 속에서 아비는 누군가를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얕은 관계만을 유지한다. 쉽게 사람을 홀려버리지만 자신의 마음에 자리를 상대방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아비의 시선은 항상 과거에 향해있어 현재를 살지 못한다.
아비에게 시간이란 항상 과거이고 지나간 것들이다. 목적지 없이 현재라는 바람에 실려 방황하는 삶을 사는 아비의 특징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모두 각자만의 이야기에서 아비가 된다.
영화에서 시계를 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시계로 보는 시간은 객관적이고 직관적이고 그래서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대는 서로 다르다.
주인공인 아비는 항상 과거에 머문다. 과거만이 지울 수 없는 자신이 지나온 삶의 흔적이고 가족에 대한 한이 맺혀 있기 때문이다.
소려진은 아비와의 그 찬란한 1분을 잊지 못한다. 소려진은 현재가 아닌 그 1분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있다.
아비의 양어머니는 이미 나이가 들어버렸지만 지나온 시절 속에 누렸던 사랑의 안락함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랑을 쫒으며 살아간다, 비록 그 사랑이 진실된 것이 아닌 거짓된 것일지라도.
아비의 친어머니는 떠나보낸 아들의 뒷모습이라도 영원히 기억하려 창문 너머의 아들을 복합적인 슬픔이 담긴 눈으로 응시한다. 또한 루루도, 경관도 지나온 과거들에 시선을 두며 살아간다.
짧은 시간의 마주침과 만남일지라도 누군가는 그 기억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간다. 시간은, 인생은 길다고?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 부족해서 미처 소중한 추억들을 꼽씹어보고 지나온 나날들의 의미를 찾기도 전에 삶의 시계는 멈춘다.
왕가위 감독은 이런 인생의 허무함을 아비라는 인물로 묘사해 표현한다.
공허한 인생이지만 그래서 빛나는 것도 역시 짧은 인생을 가진 인간의 특권이다.
현재는 필연적으로 과거가 되며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하게 빛나는 소중함은 비록 1분과 같은 찰나일지라도 찰나이기에 강렬하고 또 너무나 아름다워 영원토록 기억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지루한 94분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영원히 기억될 황홀한 시간일 수도 있다. 과거 그리고 현재 이 모든 끝없이 이어지고 순환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미는 그곳을 살아가는 각자가 부여한다. 빛나는 시간에 추억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영원토록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영화 속 아비들은 저마다의 상실로 혼돈으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반영한 것일까, 영화의 배경인 홍콩과 필리핀의 여름은 눅눅하고 불쾌한 습한 공기로 가득 차있다. 어둡고 칙칙하고 뿌연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는 방 안과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우울한 홍콩에서 아비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암울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사랑을 갈구한다.
날개 없는 새들의 슬픔이 하늘에서 내리고 담배연기처럼 자욱하게 번져나간다.
하지만 어떤 힘이 그들을 깊은 수렁 속으로 끌어내리는 소용돌이의 원천이 된다. 서로가 각자 살기 바빠서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볼 수 없다.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이다. 사랑이 돌고 돌고 또 돌고 있다.
모두가 서로의 등만을 바라본다. 루루와 소려진은 아비를, 아비의 친구는 루루를, 경관은 소려진을.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서글프고 뒤죽박죽 엉켜버린 5각 관계다.
모두가 소중한 것을 쫓아 소중한 것을 버린다.
잃어버린, 상실된 사랑은 추억으로 잘 정리해 머릿속 서랍 안에 두어야 한다. 정리를 해두지 않으면 원하지 않아도 계속 보게 된다. 과거에 머물면 현재의 소중한 인연과 시간들을 놓칠 수 있다.
과거에 머문다고, 현실에 집중하지 않는다 해서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시계는 언제나 째깍째깍 지나간 시간을 밀고 새로운 시간을 당겨오며 영원히 작동한다.
작중 주인공 아비의 양어머니가 아비에게 상처를 주면서 아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를 묶어 놓고 아비라는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새장 안에 억압시켜 놓은 것과 경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선원이 되러 떠난 아들의 모습이 둘 다 슬픈 장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교가 되어 적막한 기분을 안겨준다.
사랑이라는 내용물은 똑같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사랑은 믿음을 연료로 쓴다.
영원히 바람에 실려 나는 새가 어디 있겠는가, 또 죽어있는 새가 어떻게 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죽어있는 새는 없고, 죽은 새는 날갯짓 할 수 없다. 자신이 죽어있는 채로 날고 있는 날개 없는 새라고 생각했던 아비는 실제로 날개가 다쳐 땅에 내려앉아 상처를 돌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비는 땅에서 사랑을 받고 믿음이란 연료를 채우고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 되었어야 했다. 마음속에 큰 구멍이 있는데 누구를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환언하면,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한 아비는 현실에 지레 겁먹고 스스로를 속이며 상처 입은 몸으로 하늘을 날고 있던 처음 날았던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어리고 나약한 새였을 따름이다.
발 없는 새가 아닌 발이 땅에 닿았던 과거를 기억하는 땅이 두려운 발이 달려 있는 새 말이다.
아비를 믿고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해 아비를 찾아간 소려진, 끝까지 아비를 따라간 루루, 돈을 다시 돌려받지 못하고 자신을 봐주지 않을 것을 알지만 루루를 위해 돈을 주고 끝까지 사랑의 믿음을 잃지 않았던 아비의 친구, 매일 같이 전화부스 앞에서 전화를 기다린 경관, 경관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걸 알지만 전화를 건 소려진.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을 알고도 믿음으로 주는 것이다.
받지 못한 사랑이 아닌 준 사랑을 기억하면 영원토록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사랑은 '주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생명력이 담긴 살아있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주인공인 아비도 끝에서야 그 사랑을 느꼈다.
죽는 순간에 떠올린 그녀는 소려진이 아니었을까. 아비는 경관에게 자신이 소려진을 잊었다고 말해달라 부탁한다, 그녀가 자신이 죽은 것을 알고 또 그녀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 괴로워할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아비가 죽어가던 때 말했던 말이다.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새다. 하지만 새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새는 죽었기 때문이다. 전에 그랬었지. 내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누군지 평생 모를 거라고. 지금 그녀가 그립군.
새는 날개로 난다.
아비, 즉 나는 존재는 날개로 날지 않는다.
아비, 즉 우리들은 믿음을 연료로 쓰는 사랑으로 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믿음을 연료로 쓰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뢰는 이 세상에서 확신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단 하나이다.
새는 한 번만 날지 않는다.
방황하는 아비인 우리는 다시금 날기 위해서 땅에 내려와 상처를 치유하고 쉬어야 한다.
사랑을 채우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돌보고 채워야 하는 사랑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비정전 속 등장인물들의 선택의 기로에서 내렸던 선택은 당시 홍콩의 시대상황을 대변하는 영화의 알레고리다. 19세기 청나라왕조 때 난징조약으로 영국령 홍콩이 된 후 1997년에 홍콩을 중국에 일국양제 체제를 조건으로 반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중영공동선언이 1985년 발표되었고 이에 홍콩 시민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특수한 홍콩이라는 도시 속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운 홍콩 시민들은 이때부터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 켠에 무거운 짐이 놓여있었고, 100년이 넘게 영국령으로 속해있던 홍콩은 뿌리와 현재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홍콩의 반환이라는 사건은 홍콩 사람들에게 당시엔 아주 큰 문제였다. 단순히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정치경제적 제도의 차이가 아닌 개인의 정체성과 표현에 관한 삶의 중차대한 일이었다. 단순히 영국에서 중국으로의 국적이 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거쳐온 시간의 의미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의미가 변하면 자신도 필연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당시 이런 혼란스러웠던 홍콩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비는 상처를 받지 않는 카사노바같이 묘사되지만 겁에 질려있다. 친어머니에 버림받아 양어머니 밑에서 큰 아비는 정신은 몰라도 물질적으로 부유하다.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처럼 자신을 버릴까 봐 여자를 믿지 못하고(중국이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까 봐, 영국이 중국에 무책임하게 자신을 넘기지 않을까) 자신의 뿌리(중국)를 찾아 친어머니가 살고 있는 필리핀으로 향하지만 친어머니는 만나주지 않아 아비는 혼자가 된다.
루루는 끝까지 아비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비를 따라 필리핀으로 따라간다. 루루의 이러한 행동은 끝까지 홍콩을 포기하지 않는 자유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다. 한편, 소려진은 아비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마카오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현실로 복귀해 자신의 일을 한다(마카오의 사례, 홍콩이 반환되는 현실을 받아들임).
양어머니는 아비를 떼어놓기 위해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아비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결국 자신의 사랑을 찾아 아비를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영국). 경관은 좋아하는 소려진을 기다렸지만 마카오로 돌아간 줄 알고 선원의 꿈을 위해 홍콩을 떠난다(해외로의 이주, 마카오의 사례).
나라 간 개인의 공간적인 이동은 쉽다. 하지만 개인 마음 안에서의 국가, 즉 정체성과 신념의 이동은 쉽지 않다. 공간과 시간은 그 성질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간은 그대로인데 지나온 시간과 기억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일이라면 어떨까. 영국령 홍콩과 중국에 반환된 홍콩은 같은 홍콩일지라도 전혀 같지 않다.
홍콩에 관한 역사와 시대적인 상황이 영화에서 알레고리적으로 왕가위 감독만의 연출방식으로 나타난 홍콩의 영화 <아비정전>.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닌 근원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한한 시공간에서 우리가 주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별이 졌다.
현실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어도 영화로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란다.
사람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니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영원히 살아있다. 우리도 소중한 이들의 추억을 간직하며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되고 또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