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무리 뭐가 좋다고 해도 직접 체험해보지 못하면 하나도 와 닿지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리뷰를 보면서도 '그래, 좋다니까 일단 속는 셈 치고 사보자' , '그건 모를 일이지' 하는 마음이다.
몇만 명이 추천하는 여행지마저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그 말을 의심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데도 예외는 존재하고 왠지 그게 나일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지의 풍경이 물론 좋을 지라도 그날의 날씨가, 기분이 어떨지 모르는 일이고 돌발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같은 여행지에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보고 느끼기 전까지는 믿지 않는다. 나는 본 것만 믿는 사람이다. 경험이 중요하고 그것이 논리적으로 입증이 되고 정확한 증거와 함께 눈으로 보아야 인정을 한다. 한마디로 세상을 복잡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줄곧 반항자처럼 삐뚤어져있다. 어쩌면 이런 성향 때문에 인생을 이해하는데도 항상 늦고 쉬운 길도 굳이 돌아가며 많은 시간이 걸려 왔나 보며 앞으로도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릴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 엄마를 따라서 가게 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항상 하는 단골 멘트는 "하느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신이 있다고 믿지 하지 못하겠습니다."였다. 그럼 신부님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으로 또는 성서 어디 어디 몇 절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시면 무슨 수학 공식 풀이를 듣는 것처럼 따분했다. 아무리 읽어보고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도 삐딱선을 타고 보지 못한 것을 믿어야 하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됐다. 소설의 내용과 같이 신화적인 부분들이 가득히 담긴 성경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말씀이 살아있다'라는 것을 와 닿게 느껴본 때도 있었지만, 그런 말들은 시간을 두고 훗날 보면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들이었다. 나에게만 딱 맞게 내려온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느끼고 난 후에는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되려 실망감만 들었다. 이기적인 나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기를 바랐나 보다.
부끄럽고 송구하지만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4년이나 하고 5년 차에 장기 교사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화려한 성당 생활을 마무리했다. 솔직히 말해서 뭐라도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에 엄마의 권유로 가볍게 갔는데 열심히 다니면 엄마를 만족시켜 주는 방법임을 알게되었고, 학교 외에 어딘가에 규칙적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또 마음에 맞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관계는 사회와는 다르게 경쟁 상태가 아닌 같은 동네사람으로서 믿음과 신뢰 속에서 단순히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 좋았다. 이를테면, 성당을 이용했다. 신부님이 실망감이 크실 테지만 다시 한번 진실을 글로서 고백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내 눈에 안 비춰 주는데 굳이 성당에 가서 내 모습을 보여야 하나 싶었다. 그럴 거면 기도 하고 싶으면 혼자 하고 그냥 나의 주어진 삶에서 성경 말씀대로 착하고 정직하게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으면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특히 몇 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괴리감만 자꾸 커졌다. 그것이 주는 괴로움이 신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보다 커지기 시작해 의무감으로 성당을 가게 되고 더 이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종교와는 멀어지기로 했다.
덧붙여 나 자신도 제대로 모르고 못 믿는 사람이 무슨 다른 것에 의지하나 싶은 마음이 컸다. 우선은 내가 온전히 내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한 사람으로서 나약했다. 신을 믿을 만큼의, 그가 있다고 단언할 정도로 단단한 멘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을 만큼 짓물러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종교를 갖으려면 나약해진 상태로 문을 두드려선 안된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깊이 휩쓸리게 되는데, 위험한 점은 그럴 때 일 수록 우리는 분별력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가장 올바르게 신을 만나는 방법은 지나치게 나약하지 않을 때 즉, 자신의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추슬러내고 어려움을 한바탕 극복해 낸 후라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먼 훗날 나이가 더 먹고, 진정한 내가 되고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다른 관점으로 신을 볼 수도 있는 거니 그것은 나중에 차차 생각해보기로 한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란 인간의 이중성은 웃기지도 않다. 바로, 외계인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굉장히 매혹시킨다. 지구 밖 또 다른 행성의 존재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일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그밖에 빅풋, 네스호의 괴물, 모아이 섬, 이집트 피라미드에 관한 이야기 멕시코의 유적 등과 같은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긴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것들을 믿어서가 아니다. 물론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실제로 미스터리한 일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또 정말로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뉴스나 과정이 담긴 비디오 등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미스터리를 말 그대로 미스터리로 남겨놓을 작정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보지 않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믿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존재하기를 간절히 믿는 셈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내가 외계인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느낀 거라면 아주 좋았겠지만,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있는, 한마디로 생뚱맞은 사람 같았다. 사람들과 이질감이 들었다. 지구의 사람이 아닌 기분이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둥지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일로 이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보통 사람은 이걸 보고 울지 않는데. 보통 사람은 이런 일로 기죽지는 않는데.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우러지던데. 보통 사람은 이 정도 일이면 행복하던데. 보통 사람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던데...
나는 다른 행성에서 건너온 사람 아니, 사람도 아니고 무슨 외계인 같았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품었고 믿지도 않는 외계인을 좋아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나 보다. 약간의 동질감이 생겨버린 건가.
어릴 때 외계인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다큐를 접했을 땐 밤잠을 설쳤다. 며칠 동안 그 화질이 좋지 않은 어둡게 찍힌 비디오를 머릿속에서 돌려내며 벌벌 떨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여러 영화를 접하며 알게 된 건 외계인이 단지 혐오스럽고 무섭고 징그러운 괴물이 아니라, 그냥 다른 행성에서 지구에 사고로 또는 호기심으로 오게 된 생명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위안(?)이 되었다.
닐 블롬캠프 감독의 영화 <디스트릭트9>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일종의 외계인 난민촌이 형성된 것이 배경인데 그 영화 안에는 지구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해치는 외계인으로만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들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고 기술적, 지능적으로 우월한 그들을 견제하고 잔인하게 죽이거나 이윤을 위해 밀실에 가둬놓고 실험대상으로 삼는다.
이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내면에서 소리 없는 고함을 질렀다.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단 하나의 사실에서 시작된다. 바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문명의 존재로 인해 우리 우주에서 생명체가 발생하고 이들이 문명까지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되었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외계의 존재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름을 배척하면서도 다름을 갈망한다.
앙투안 생 택쥐페리는 자신의 책 어린 왕자에서 비행기 조종사인 본인이 어린 왕자가 살고 있는 B-612라는 행성에 불시착하며 일어난 일화를 묘사한다. 이 책 또한 외계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려준 계기 중 하나였고 동시에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주옥같은 대사들이 핵심이다.
어린 왕자도 사실 지구인들에게는 지구 밖의 인물 즉 외계인인셈이다. 그 행성 안에 있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읊어주던 동식물 장미꽃, 뱀, 사막여우, 바오밥나무 그리고 왕, 허영심 많은 남자, 술꾼, 사업가, 가로등을 켜는 사람, 지리학자, 철도원, 장사꾼, 천문학자와 같은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외계인이다. 지구인인 조종사와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으니까.
우주에는 징그럽고 위험한 외계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외계인 같다고 느껴지던 나를 미워하고 싫어했다. 지금은 외계인 같던 나를 어루만져 주고 좋아하는 연습을 해나가는 중이다. 그림을 통해 치유하고 글을 통해 상처를 더듬거려 본다.
'외계인 같다', '사차원이다'그리고 소위말해 ‘또라이’ 라는 말. 이들의 공통점은 전부 '타인과 다름'에서 비롯된다. 보통의 행동, 보통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다르게’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수식어를 갖는 사람들은 뒤집는 사람들이다. 좋은 방향으로 또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서 정해진 방식과 사고를 뒤집어놓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이 순환되지.
외계인은 나쁘지 않다. 아무튼 확실한 건 외계인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일 뿐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Ce qui embellit le désert, dit le petit prince, c'est qu'il cache un puits quelque part...”
- 어린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