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나의 선생님
하얀색을 옷을 정말 좋아했다. 하얀 바지나 티셔츠를 입는 것은 나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엄마는"털털 뱅이 안돼!" 했다. 엄마와 옷을 고르러 가면 나는 일단 하얀색 쪽에 기웃거렸다. 그럼 엄마는 "너는 꼭 하얀색 옷을 입을라고 하더라. 근디 그거 빨래는 누가 허냐. 일일이 손빨래 해얀디 그거 다 내 몫으로 돌아온다잉. 안돼!" 하셨다. 그럴 거면 왜 같이 온 거냐고 짜증을 부리면 엄마는 "하이고 까탈 쟁이가 내 맘에 들어서 사 오면 퍽이나 입겄다!"
말하자면 디자인은 내가 고르고 색은 엄마가 정하는 식이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기회가 와도 결국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되자 온통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비교가 시작됐다. ‘오빠가 고르는건 다 사주더니 나는 왜 안 사주는 거지. 동생은 사달라고 하기도 전에 나서서 잘만 사주던데 나를 미워하는게 분명해...’
다시는 엄마와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도 돈을 지불해주는 엄마가 필요했기에 나는 겨우 타협해서 또다시 쇼핑을 가면 비슷한 내용으로 서로가 기분이 상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장을 보러 가서 신나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워 담으면 "이거 못써! 불량식품이 고만." 퇴짜 맞기 일쑤였다.
머리가 비상하고 꾀를 잘 쓰던 오빠는 엄마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몰래 집어넣기 기술을 사용했다. 계산대에서 그것이 발각되면 나는 분통이 터지고 오빠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내고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계산을 해준다. 다음번에 나도 오빠를 따라서 하려고 시도했더니 "이것들 엄마가 모를 줄 알어?" 하며 순순히 넘어가 주지 않았다.
100원 하던 새콤달콤이 있던 시절, 오빠와 슈퍼에 가면 고민에 빠진다. 딸기맛을 살까 포도맛을 살까. 새로 나온 복숭아 맛을 살까. 오빠는 망설임도 없이 포도맛을 고른 후 머뭇거리는 내게 빨리 고르라고 보챈다. 무엇을 살지 모르겠다고 하면 오빠는 "그럼 나는 포도 샀으니까 너는 딸기 사"라고 일러준다. 그럼 곧바로 딸기맛을 들고 나와서는 몇 개를 교환하기를 원한다. 그럼 오빠는 포도맛만 먹고 싶어서 산거라며 싫다고 완강히 거부한다. 그럼 나는 오빠가 사라고 해서 산 것이며 나는 포도맛도 좋은데 어떡하냐고 말하면 오빠는 "그러니까 니가 골랐어야지" 하면서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그럼 나는 "니가 딸기맛 고른 거잖아! 포도맛 내놔!" 하고 억지를 부린다. 그럼 금세 싸움으로 번지고 딸기맛 포도맛을 떠나서 오빠를 너라고 부르고 떼를 부린 것 까지 부모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버릇없다는 주제로 혼이 난다.
누군가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면 좋은점이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그 사람에게 잘못을 덮어 씌울 수 있음이었다. 그럼 내가 비난받기보다는 상대를 물고 늘어질 수 있으니까. 내가 혼나지 않으니까. 그게 편해서 서서히 결정 내리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형제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니 어느 순간엔 선택 후에 찾아오는 난관인 고집을 부리고 싸우고 혼나고 그 선택을 지켜내는 일이 피로로 다가와 나를 억눌렀다. 또 자신감이 부족해서 뭐든 남이 대신 결정해주기를 기다렸고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나의 결정이 잘못될 거라고만 노심초사했다. 내가 내린 결정은 누구의 결정보다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의 떡이 커보였다. 불안이 낳은 열등감이 키워낸 위기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손들어 발표한 적은 없을뿐더러 아는 것이 나왔을 때도 주변 친구들 눈치만 봤다. 어쩔 때는 선생님이 나를 시켜주기를 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쳐다봤지만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을 시키려 할 때는 혹시라도 나를 지목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니 당첨이 아주 잘돼서 그때는 대답을 못해 핀잔과 망신살을 받았다.
그래서 아는 것이 나오면 눈을 내리 깔고 고개를 떨군 후 앞자리 앉은 애의 등 뒤에 최대한 숨어내고, 모르는 것이 나왔을 때는 눈을 반짝반짝 뜨고 선생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발표를 하고 싶을 때는 시켜주지 않는 선생님이 야속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나서서 발표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슬쩍 말한다. "아 나 이거 아는데." 안절부절 쭈뼛쭈뼛하고 있으면 친구가 옆에서 답답해서 "야 손들어! 빨리." 그럼 나는 어쩌지 하며 또 망설인다. 그럼 보다 못한 친구가 옆에서 대신 "선생님~! 얘 발표하고 싶대요." 한다.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나서 개미만 한 소리로, 그리고 엄청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해버린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 심장은 바깥으로 들릴만큼 크게 쿵쿵거리고 손에 식은땀이 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들어 '와 나 진짜 멋졌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그리고 너는 입에 오도바이(오토바이) 모다(모터)가 달렸냐? 왜 이렇게 빨리 말해~" 하면 반 급우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말을 빨리 하는 것은 습관적이었다. 집에서 두 형제와 살다 보니 빨리 말해야 엄마 아빠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보다 무조건 더 재빠르게 말해야 했다. 오빠랑 나는 자주 같이 있는 탓에 똑같이 동시에 재미있는 유머나 정보를 듣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집에 가서 동생에게 설명해주고 이때도 오빠와의 실랑이는 계속된다. 내가 중요한 부분을 빼고 이야기한다거나 엉망진창으로 웃긴이야기도 안 웃기게 이야기를 하면 오빠는 옆에서 답답해서 덧붙이고 그게 아니라 하면서 재설명을 한다.
사실 오빠가 정리해주면 속이 다 시원하고 오빠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내가 했을 때 보다 재미가 극대화되어 훨씬 나은 것을 알지만 단지, 관심받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린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오신 부모님에게 이야기해주려고 하면 꼭 오빠가 선수 치거나 동생이 들은귀가 있다고 옆에서 조잘조잘 거들었다. 나는 이야기 시작도 못한 채 오빠와 동생의 말에 묻혀 결국 입이 대판 나와버린다. 부모님은 똑 부러지고 논리 정연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오빠 말을 주로 들으면서 어설프게 오빠를 따라 재잘대는 귀여운 동생을 바라봤다.
고등학생이 되고 학교 근처에 골프용 의류를 파는 곳이 크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현수막이 걸렸다. 바로 '앙드레김 사인회'.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데 친구들이 하나둘씩 유명한 사람이니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을 했다. 전주 촌구석에 유명인이 온다고 하니 며칠간 학교가 떠들썩했다.
나는 앙드레김 선생님을 잘 몰랐지만 그의 하얀 옷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항상 입고 싶었던 하얀 옷. 선생님처럼 위아래로 다 입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원 없이 새하얀 옷을 입는 그분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나도 대세를 따라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전교생이 그 일에 대해 떠들썩 하자 학교에서 위기를 느꼈는지 단속을 하겠다는 것이다. 사인회는 점심시간 이후부터였고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몰래 이탈하려는데 담임선생님한테 딱 걸리는 바람에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런데 다른 반 아이들 중에 초반부터 머리를 써 애초에 급식을 포기하고 미리 나간 몇몇 그룹이 있었고 그 아이들은 보란 듯이 앙드레김의 사인을 받아서 자랑스럽게 돌아왔다.
쉬는 시간에 그 무리에 사람이 몰렸다. 한 친구가 영웅담처럼 말했다. "나는 밥 먹기를 포기하고 싸인을 얻어왔어. 꽤나 오래 기다렸지 가서도" 하며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와 신기하더라. 근데 옷이 너무 하얘서 멀리서도 눈이 부담스러웠어. 머리카락은 한올도 안 삐져나오고 완전 밀착 고정이야. 근데 놀란 게 사인받으려고 바로 앞에서 보니까... 음 점심에 뭘 드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김칫국물 같은 게 그 새하얀 옷에 희미하게 튀어있었어!" 교실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초토화되었다.
나는 그때 하얀 옷의 진정한 단점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점심에 무엇을 먹은 지 까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여간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돌아보니 안 되겠다 싶었다. 워낙 잘 흘리고 묻히고 엎고 깨트리고 망가트리고 하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는 일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 오빠에게 흰옷을 입고 싶다고 했더니"돼지가 하얀 옷 입으면 하얀 돼지겠지~"하고 놀렸다. 그리고 얼마 후 모 연예인이 하얀 바지를 입고 화보를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와 진짜 예쁘다. 야 솔직히 하얀 바지는 아무나 입는 게 아니지. 안그러냐. 이건 진짜 몸매가 되는 사람이나 입어야지 보통 사람이 입으면 살이 다 튀어나와서 울퉁불퉁 다 비치고 부 해 보여." 하는 것이다. 조금 놀라게 되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하얀색이 좋았을 뿐인데.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던 나는 하얀 바지에 절을 두 번 올렸다.
대학생이 되니 내가 정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시간표도 스스로 짜야하고, 행사에 참여 할지 안할지 등 뭔가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는 포기를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안 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쩌다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도 결정하고 나서 "나 이거 하는 게 맞을까?"하고 자진 여론조사를 한다. 그래서 막상 주변 반응이 좋지 않은 것 같으면 시작한 것도 중간에 그만두고 하지 않았다. 결단력은 추진력과 연관이 된다. 그런데 결단이 안되니 아무것도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누가 결정해주기를 바라면서 막상 '네 덕분에 잘됐어'라는 말은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잘 됐을 경우에는 상대가 대신 해준 선택을 인정하기 싫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남 탓'이라는 말을 제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이 바보 같고 한심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과감하게 선택하고 멋지게 결정하는데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다니. 누군가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주는 게 아닐 텐데. 나도 자율적인 멋진 어른이 되고싶었다.
어느 날 그런 나를 돌이켜보며 말했다.'너, 정말 못났다.' 속이 답답했다.
미워하기가 시작됐다. 또 시작된 것이다. 나의 주특기.
엄마랑 떨어져 살면서 이제는 나도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보자 하고 신이 나서 실컷 마음대로 입어보자며 한때는 디자인이 다른 하얀 바지를 여러 개 사들였다. 몸매가 통통하든 어쩌든 한 번은 꼭 입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자주 입던 흰색 상의는 소매가 시컴해지고 때가 찌들었다. 음식물이 묻어 굳기 시작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못하게 하던 일을 끝내 해버리는 것보다 신나는 일이 있을까.
그렇게 마음껏 더럽히며 흰옷을 입다가 대충 세탁기에 넣고 돌리니 새하얗던 옷은 세제의 색을 입고 보랏빛이 은은하게 물들어 나왔다. 손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못하고 결국 안 빨고, 안(못) 입다가 또 다른 하얀 옷을 샀다. 어른이 되어서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점이 바로 모든 결정권과 책임이 내게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용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다 보니 소비에 관해 세심하지 못했다. 한 달에 돈이 모자라면 더 달라고 조르거나 핑계로 둘러대면 됐다. 그러나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이제는 용돈이 아닌 직접 벌어 써보니 이야기가 달랐다. 작지만 잦은 소비가 쌓이고 쌓여 구멍이 송송 나는 통장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아.. 이래서 절약이 중요하고선택은 신중해야 하는구나.'라고 뼈저리게 느꼈다. 대충 해버린 선택은 늘 손해를 가져다주었다. 금전적으로.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 스트레스로도 이어졌다.
여전히 하얀색 옷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실용성을 따지게 되어 흰옷 사는 일이 드물어졌다.
옆에서 잔소리해주던 엄마가 괜스레 그리워졌다.
이제는 떨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나면 여전히 티격태격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죽이 잘 맞는다.
"아이고 가시네 그렇게도 안 맞더구먼 인자는 우리가 제일 잘 맞는 때는 쇼핑할 때여 잉"
이제는 엄마가 빨래 감당을 안 해서 일까. 세월이라는 섬유유연제가 효과를 봐 엄마가 유해진 것일까.
"딸랑구 네가 좋아하는 흰옷 봐 둔 거 있어"
27살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모든게 새로웠다. 남 중심으로 살던 내가, 나만의 도화지를 채워나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신선한 일이었다. 삶이 온전히 내 위주로 돌아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움을 초월한 그 이상의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자꾸 가르쳐 주었다. 많은 것을 다정하게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선생님과 같았다.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비난하지 않고 집중하며 귀 기울여 줬다. 나의 속도에 맞게 구겨진 나를 올바르게 펼쳐주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는 행위 자체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스스로 그림 소재를 정해야 했고 종이 위에서 그릴 대상의 위치도 정해야 한다. 어떤 도구로 그려낼지도 전부 내가 고른다. 맘대로 하얀 종이를 다른 색으로 덮어나가는 과정은 하얀 티셔츠를 더럽히는 것보다 짜릿했다. 가끔 구도를 잘 못 정해서 도화지가 모자란다거나 너무 작게 그려서 여백이 많아지기도 했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 초반에는 맘에 들지 않아 찢어낸 그림도 많다. 그런데 꾸준히 그려보다 보니 어느 순간 부터는 끈기가 조금씩 생기더니, 이미 시작한 그림을 한 두 가지의 결점 때문에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 신중하게 색을 고르고 선을 그어 나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물론 어떤 때는 고심하지 않고 느끼는 대로 색을 골라낼 수도 있는 자유로움 또한 그림의 매력이었다. 어떻게든 완성을 해내면 버려 버릴까 하고 고민했던 작은 실수도 별것 아니었다는걸 느꼈다.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숲을 보기 시작했다. 중간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끝을 내보면 그 마음은 달라진다. 나는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감을 얻으며 선택을 하는데에 있어서 생기는 두려움을 서서히 떨쳐내갔다.
대학에서 수업중에 교수님이 대뜸 그러셨다.”프랑스인들이 왜 입술이 얇은줄 아세요?” 학생들은 어리둥절 했다. 교수님의 대답은 “ 하도 말을 빨리, 그리고 많이 해서 그렇답니다”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난 지금도 흥분하거나 누군가 내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되면 긴장이 되어 말이 빠르다. 그래서 말하기 보다 쓰기가 좋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중간에 “누가 안 쫓아와. 딸, 숨 쉬어.”라고 해줄 정도로 급하게 호흡을 헐떡인다.
나름대로 의식하며 빨리 말하기를 고쳐보려 노력했고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 둥글어지면서 예전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말 자체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그런데 프랑스에 외국인 입장으로 살다 보니 문장을 정확히 느리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틀리더라도 빨리빨리 말을 해야 사람들이 인내를 갖고 끝까지 들어주고 반응을 해주는 것이었다. 프랑스 뉴스를 보면 특이한 점이 사실 전달, 즉 보도 위주보다 그 뒤에 전문가들의 토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정보 전달은 잠시고 바로 그 정보에 대해 스튜디오에서 여러 관점으로 토론을 이어가는데 웃긴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참 빠르게도 말한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발언권이 자꾸 상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예의를 지키며 한 사람씩 차례를 기다려 정중하게 말하는 프랑스인들을 상상했는데 현실은 토론이 무르익어 가면 침 튀기며 자신의 언성을 높이고 상대가 말하고 있어도 일단 재빠르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앵커까지 그들을 중재하고 말리려 끼어들다 보면 동시에 3-4명이 발언을 한다. 그래서 뉴스를 보면 무슨 쌓아놓은 젠가 블록이 다방면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난리가 따로 없다.
이렇게 토론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인 것은 확실한데 문제는 얇은 입술을 가진 이런 프랑스인들 때문에 나의 '말 빨리 하기 병'은 다시 재발했다.
이렇게 남의 탓을 해본다. 난 아직 갈길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