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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작몽상가 Dec 15. 2020

외향형이 뭐라고

외향형이어야 마음이 놓였던 내향형의 인간의 이야기

성격 검사지를 받으면 선생님들은 누누이 지나치게 깊은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본인에 가깝게 해당되는 곳에 표시를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한때 그게 뭐라고 뭐 그리 중요한 일처럼 여겼는지 검사를 앞두면 떨리고 긴장하며 그 지표가 나라는 사람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자료라고 생각돼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나에게 당시 성격 검사에 있어 좋은 점수란, 외향형 내향형을 나누는 수치에서 외향형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와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내향형이 나온 친구와는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왠지 사교성이 부족하며 지루하고 유머도 없고, 분명 사회생활을 하는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아주 크게 오인했다.

 

게다가 ‘공부를 못하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해 스스로 격한 동의를 했던 나였다. 그래서 성격이라도 좋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자문했는데 곧 '활발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해맑으며 잘 웃는 아이'가 해답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늘 예견된 대로 ‘외향형’이 나왔다.

실제는 '외향형인 척'을 잘 연기하던 '내향형'인간이었다.

검사 지표에서는 외향형이 찍혔고, 안도감이 들었다.

외향형이어야 마음이 놓였던 내향형의 인간.


우리는 왜 밝음이 강요된 걸까?

나는 왜 스스로에게 밝음을 강요했을까?




프랑스에서 인턴을 하는 시절에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맨날 웃고 다녀? 무슨 좋은 일이 그렇게 매일 있는 거야?"

라며 웃음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굳이 치켜뜨지 않아도 이미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빤히 고정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눈치가 빠른 나는, 그 의도가 정말 궁금해서가 아닌 나의 행태를 비꼬기 위해 말했다는 것을 잘도 알아챈다. 하긴 평소에 말을 거칠게 하고 상사에게는 눈웃음 지어 내면서 나와 같은 인턴에게는 필터 없이 막말을 하며 감정을 쏟아내던 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웬만한 눈치 없는 사람도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잘 웃는 거는 진짜 좋은데 상황 봐가면서 일을 똑바로 하면서 그러든가."라며 이를 깨물고 미간으로 눈썹을 끌어 모아서 추켜올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말을 듣고서 '그래 내 할 일을 잘하면서 미소 지어야겠다'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웬만하면 웃거나 미소 짓지 말라는 뜻이었다. 없는 사람처럼 있으면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자신들이 하는 말에 기분이 나쁜 것을 뻔히 아는데 숨겨가며 억지 미소를 짓지 말라는 뜻의 말이었다. 그렇다고 뚱하게 있으면 또 그 표정으로"하기 싫어?"와 같은 말을 던지며 '배움의 의지'가 결여된다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었다. 그냥 단순히 괴롭힐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고 그게 인턴의 역할이었다. 이 결론은 내가 이상하게 확대 해석한 것이 아니라 진정 그녀들의 의도였다는 것을 함께 일하던 인턴 친구들과 같은 느낌과 취급을 받은 것을 공유하면서 확실해졌다.

직급으로 따지면 상사였던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 속에서 묵묵히 그를 받쳐주는 종량제 봉투 역할을 해내며 잘해도 혼나고 못 하면 더 혼나면서 그들의 기분을 하루 종일 살피며 감정 노동을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마칠 때까지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을 때가 돼서야 나의 인턴 생활은 끝이 나 있었다.


두 가지를 배웠다.

첫 번째, 세상 어딜 가나 갑질이 있구나. 사람 사는 데는 결국 다 똑같구나. 감정적으로 사람을 탈진 상태로 만드는 것이야 말로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아 증거가 없는 비겁하고 잔인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로망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는데 그래도 서양은 사회적 계급 같은 것이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로 인간 사이에 최소한의 존중은 있지 않을까 하고 믿었는데 사실은 국가도 국적을 넘어 역시나 어딜 가나 우리는 한낱 다 같은 '인간'일뿐이구나. 이로서 두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지금에야 내공이 쌓여서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지만 그 당시는 어리기도 했고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그렇게 당하고 집에 와서야 눈물을 쏟고, 하루하루 그들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이를 악 물고 출근을 했었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머릿속에 뭔지 모를 조금 빨갛고 얼얼한 기분이 며칠, 몇 주 동안 떨쳐지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거울을 보면서 입꼬리를 가만 두었다 올려보았다 내려보았다 반복해보며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것인지 어쩌다가 이런 짓까지 하게 된 지경에 온 것인지 한심하고 짜증이 났다. 인간관계의 공허함이 나아가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나쁘게 보여도 누군가를 아프게 해도 상관없으니 나 자신이 다치지 않고 볼 일이었다.


'웃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식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웃으면서 '잘' 대해주는 것이 상대에게는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가벼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구나.'


그럼 나는 왜 누군가에게, 어쩔 때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까지 왜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걸까?라고 되물었다. 그게 왜 중요하지? 나 자신을 고문하면서 까지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내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말을 돌이켜보니 정말인지 왜 이렇게 힘을 주고 살았는지, 심지어는 잔 근육에까지 뭐하러 이렇게 힘을 빡 주고 살았는지 안쓰러움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실망감에 몸서리를 쳤다.



사실 내가 항상 미소 지었던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바로 쭉 내려간 입꼬리가 싫었다. 가만히 있을 때 꼭 삐진 사람,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콤플렉스가 돼서 입과 볼의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매일, 매 순간 그놈의 입꼬리를 올리는 데에 신경을 썼다. 외출을 하려고 집 문을 나서면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봐, 내가 그 사람을 보기 전에 그 사람이 나를 어디선가 먼저 봤는데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서 나중에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볼까 봐(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그런 쓸데없는 것이 두려워서 잔뜩 긴장을 하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남을 너무도 의식하면서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그토록 고집했던 문제의 '외향형의 인간'이 되려면, 그 결과를 받아내려면 매사에 잘 웃으며 밝아야 하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바보


세 번째는 정말 순수하게 단순히 미소가 주는 상쾌함을 나누고 싶었다. 서로 밝은 얼굴로 맞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또한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그를 경계하자는 마음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가 좋지 않은 사람 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동등하게 대하는 시작을 위해서였다. 나름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좋은 의도였고,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그 뒤로 나는 웃음기를 쫙 빼고 그녀를 대했는데 어느 날은 평소답지 않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말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심각해졌어? 좀 웃어봐~."

"너 그거 아니? 한국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너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거 같아."라고 말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최악이다.

하지만 이런 일 쯤은 사회 초년생이라면 견뎌내야 할 서러움이자 인간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느껴야 할 부당한 비참함이었다.


그 뒤로 프랑스 사람들이 평소에 얼굴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또다시 레이더를 세우고 관찰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일은 결국 문화의 차이 이기도 한 것 같다고 느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에서는 실실 미소 짓고 다니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사람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이 떼를 쓰거나 어린양을 부리지 못하게 단호하게 제지하고 어린이 다운 말투나 행동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어른이 아이를 대할 때 어른을 대하듯 냉정하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대하는 편이다. 최대한 진지하고 어른스럽게 자라야 하니까. 그래야 프로페셔널하고 사회에 나가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와 분위기에서 자라면 미소나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나올 확률은 현저히 낮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긴 아무리 농담을 잘하고 재미있는 밝은 사람들도 평소에는 엄청나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경우에만 그 이야기에 맞게 정말 웃을 일로만, 그때에만 웃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얼굴의 근육을 축 내리깔고 보통의 상태로 돌아간다.




미소천사로 불리던 배우 서민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겪은 일화에서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https://youtu.be/MiipgqTD-8U

배우 서민정의 일화


서양 문화권에서는 웃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웃음조차도 실용성을 따지는 것 같다. 웃을 상황에만 유용하게 실속 있게 적당히 웃어야 하고, 웃지 않을 상황에까지 웃고 있으면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거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프랑스에 살더니 표정이 많이 어두워졌다고 증언했다. 당연한 결과다. 외향형처럼 밝게 보이려고 미소를 마구 흘리고 다니는 것을 그만뒀으니까. 여기에 살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나의 모습 중에서 실실거리는 미소가 깃든 가면을 뒤로 빼놓고 대신 무표정하거나 혹은 심각한 모습의 가면을 끼우고 사니까.

물론 때로는 실없이 웃기도, 깔깔 거리며 웃기도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에서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 또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만 하게 되었다.


밝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오니, 밝음을 가벼움으로 바라보는 사회로 오게 되었다.


어쨌든 인간은 어떤 방향에서 늘 지휘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지휘자가 있으며, 공존해야 하는 타인이 존재하는 이상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검사지에는 내향형이 나온다.

이 또한 당연한 결과이다.

나를 속이는 일을 멈추었기 때문에.


진정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자연스레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덕분이랄까. 사회에서 자유자재로 쓰게 된 가면들도 있긴 하지만,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 내가 느끼기에 최대한 편한 대로 해본다. 자존감이 조금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 뭐든 억지로 하는 일보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게 된 일이 많아졌는데 그 말은 감정을 어느 정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자존감과 곧 연결된다.

이건 프랑스에 와서 겪은 일들 때문에 바뀌었다기보다는 삶을, 사람을 점차 이해해 가면서 그리고 내가 다방면으로 성장하면서 어떤 면에서 조금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의 본성은 검사지의 결과대로 내향형이지만, 동시에 선택적 외향형이 되었다.

누군가와 있을 때 마음이 편하거나 밝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결이 맞는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외향형이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시간을 많이 보내며 특히 나 자신에게는 있는 그대로인 내향형에 머물며 내면을 들여다보고 탐구한다. 아주 고요한 시간 속에 힘주지 않는 진짜의 나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시간들에 감사하며 더욱이 내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감각이 섬세해지는 것을 바라며, 그를 키워가는 중이다.

또한 지금은 결과지에 표시되는 '내향형'이라는 사실이 좋고 편안하게 느껴지며 왠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나의 내향성이 내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물결을 따라 세차게 헤엄 친다.


성격검사지에서 사람은 외향형 내향형으로 나뉘지만, 실은 인간은 두 가지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고 그것을 어떤 상황에서 자신에게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모습을 더 많이 꺼낼 뿐이다.

외향형? 내향형? 결국에는 이 지표가 무슨 필요인가.

외향이든 내향이든 자신을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일치감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게 살아갈 뿐이지.

다행인 건 외향형이 되려고 발악했던 어리석은 아이는 이제 떠나고 없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그렇지 않게 되고 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주변에 가끔 등장하는 잘 웃는 사람들은 특유의 아우라가 있으며, 뭔가 이 현실에 반하는 모습 때문인지 초연하게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더라. 그런 모습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굳건함은 소신이며, 소중한 당신의 미소를 보면서 좋은 에너지를 얻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러니 그것을 나처럼 멈추지는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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