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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작몽상가 Dec 09. 2020

집순이의 특별한 외출

'집순이'라는 말이 생겨서 무척이나 기뻤다.


 한 공간에 자신을 자주 고립시키는 사람을 옹호해주는 말이 생기다니.

왜인지 집에만 있는 사람은 활동적이지 못하다거나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아니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에는 게으름을 부리는 것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정신 건강에 필요하다면서 집구석, 방구석에서 뒹굴거려도 한심한 사람이 아니게 된 축복받은 세대에 (운 좋게) 살게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는 코로나 사태로 밤 9시 이후 야간 통행 금지령과 평소에는 식거리나 생활필수품만을 구매하러 시간과 날짜, 개인 정보가 적힌 외출증을 작성하여 하루에 1번, 하루에 1시간, 1km 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거리 제한이 없어지고 외출증을 동반하여 하루에 3시간 외출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런 규제가 있지만 사실상 사람들이 착실하게 3시간만 나가는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 사람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성보다 죽어가는 경제를 더 심각하게 걱정하고 자신들의 인권 즉 마스크나 이동 규제, 제한으로 인해 침해되고 있는 개인의 자유에 더 민감할 뿐 이 질병의 심각성을 우려하거나 정부의 방침을 신뢰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뭔가를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말하자면 귀가 들리는 귀머거리가 된 기분이 들곤 한다. 왜냐하면 뉴스를 있는 그대로 듣고서 믿는 사람이 없다. 보도되는 중증환자의 심각성이나, 환자 수, 사망자 수를 보고도 저게 뭐가 많다는 건지, 왜 이런 별것도 아닌 바이러스 따위에 경제가 멈추어야 하는지, 왜 외출 제한을 하는지 등 조작 의혹을 던지고 마크롱 정부는 독재가 따로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만 보았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이 정부의 음모라던지, 제약회사의 전략이었다는 말만 나올 뿐 실제로 주변에서 이 바이러스는 정말 위험하니까 우리 가족을 위해, 타인을 위해, 모두의 건강을 위해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고 확산 방지를 위해 힘쓰자는 사람은 정말인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그런 프랑스인을 진심으로 목격하고 싶다.)

한국의 대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어보고 온 나로서는 이곳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프랑스는 무슨 나라인가? 쎄꼼싸(c'est comme ca)의 나라 아닌가! ( 대략 '그냥 그럴 뿐이다'라는 뜻.)

어차피 나는 한국에서는 한국 방식을 따르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방식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 피곤해지고 어차피 프랑스인들과는 문화적 배경이, 정서 자체가 달라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토론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하기 때문에 나도 많이 해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쳐서 피하게 된다. 어차피 토론이란 말 그대로 토론일 뿐이지 누구도 설득을 시킬 수 없을뿐더러 결론이 없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결론의 이야기를 말로 풀어낼수록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된 적이 많다 보니 열띤 토론을 관뒀다.


 아무튼 이런 상황적 배경에 나는 정말 FM 방식으로 규제를 누구보다 잘 지켜나가며 장을 보기 위해서만 나가곤 했다. 어쩔 때는 일주일 만에 밖에 나가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바깥세상의 공기를 맡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조차 거슬리고 낯설 때도 있다.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해본 적이 없다.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 집순이의 대표주자로서 오히려 안나가야 한다고 되어있는 게 나가야만 한다는 핑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압박이 없어서 좋았다. 그렇게 집에 하루 종일 붙어서 먹고, 자고, 놀면서 실업급여를 꼬박 받고 있어서 은퇴자의 삶을 미리 체험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외출 규제가 풀리자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어쩜 너는 연락도 안 하고 나를 잊을 수 있냐면서 너무하다고 혼을 내고서 근황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신혼집에 꼭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몇 번을 초대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지하철을 이용해서 대략 40-50분 거리에 있는 친구 집에 가는 것이 사실 부담이고 멀게 느껴져서 매번 다음에 갈게 하고 거절한 것이 수차례 경력이 쌓였고 이제는 거절할 기회가 더 이상은 없게 되었다. 또 현재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순이 자격으로 집에만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핑곗거리 없이 승낙 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3시간 외출제한을 어기고 외출증을 두번 끊어낼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멀다고 투덜투덜거리면서 친구 집에 도착해서는 안 불렀으면 서운했을 뻔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집순이들의 특징이라고 하더라.

나가는 게 그렇게 귀찮지만 막상 어떻게든 나가게 되면 누구보다 엄청 신나게 보내고 돌아온다고 한다.( 말이 있다.)

웃음이 났다. 정말 딱 나다.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데 문득 목에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내 목도리가 어디 갔지?'


그때는 이미 친구 집에서 나와 교외선 기차를 한번 타고서 지하철로 갈아타려고 딱 내린 후였다.

예전에 물건을 잃어버린 전력이 너무 많고, 소매치기를 당한 일도 정말 많아서 밖에 나가면 항시 긴장하고 조심하는데 이번에 아마 목을 딱 감싸는 구멍에 끼우는 형태의 목도리가 잘 끼워지지 않았는지 풀려서 흘러내린 것 같다. 휴대전화와 가방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정작 목에 두른 것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 집에서 기차역까지 도보 2-3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물건은 단순한 목도리가 아니라 한국에서 친한 언니가 프랑스에 일부러 나를 보러 오면서 가져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겨울이 오면 그 목도리를 꺼내서 항상 메고 다녔다. 그래서 이대로 그를 보내기에는 애착이 많았던 탓에 추위 속에 임신 4개월의 친구를 염치 불고 괴롭혀가며 기차역에 가봐 달라고 말했다.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떠나는 자리를 항상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그날도 어김없이 기차에서 내릴 때 분명히 자리를 확인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내렸는데 착석하기 전에 잠시 서 있던 쪽에서 떨어진 게 아닌가 싶다.


결국에는 찾지 못하고 찬 바람을 쌩쌩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속상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거의 안 나가던 집순이가 큰 맘먹고 오랜만에 드디어 한번 나갔는데, 평범한 외출이 되지 못하였다는 점이 애석하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이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가.

그런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목도리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



 사실은 물건 따위에 집착하지 말자며 따뜻한 말 한마디, 정서적으로 따뜻함을 느끼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피부로 직접 닿을 수 있었던 보온을 해주던 목도리가 없어지자 정말 놀라운 것을 느꼈다.

실제 접촉되는, 말이 아닌 눈에 보이는 손에 감싸지는, 피부에 와 닿는 따뜻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목도리를 사람으로 치면 내 목을 두 팔로 꼭 감싸 안아주던 이가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단순히 허전하다고 하기에는 텅 빈 허전함의 이상이었다.

순간적으로 냉동 창고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 이래서 사람 간의 사랑에는 실제의 접촉이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구나.'


연인들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랑을 표현하면서 말로만 하지는 않는다.

하긴, 말로만 사랑한다고 해도 되는 것이면 얼마나 편하겠지만, 말로만으로 다 하지 못하는 게 사랑이지.

말 뿐인 사랑은 접촉이 동반되는 사랑보다 덜 강하구나. 진정한 온기를 제대로 나누려면 '살갗 닿기', '피부 접촉'이 필요하다. 식상하지만 정말인지 줘도 줘도 모자란 것이 바로 사랑인가 보다.


말로 줘도 부족하고 또 접촉을 해도 부족하게 느껴져서 때로는 선물을 주는 것일 테고, 요리를 하고, 시간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한다.

한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따뜻함 때문에 어떤 일도 하는 것이 사랑이구나.


사랑을 표현함은 마치 응급실 같다고 생각됐다.

생사를 오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갖 기계를 가져다가 끼우고 주사를 넣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보는 응급실의 긴급 처치처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다친 사람의 차가운 기운을 따뜻하게 돌려놓으려고, 그 온기를 함께 느끼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


물리적으로 온기를 얻는 게 정서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랑을 우선적으로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 사람들은 접촉의 표현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말로 하는 사랑에도 서툴렀고, 그는 포옹이나 신체 접촉으로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이 그러셨다.

물론 그렇지만,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현을 했을 때야말로 사랑의 그릇에 뜨끈뜨끈한 하얀 쌀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둥그런 모양으로 먹음직스럽게 담기게 되는 것 같다.

결국에는 따뜻함을 어떤 방법으로든 더 많이 주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사랑을 말하지 않고 또 안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조금 없기는 하다.


지금의 마음으로, 오늘의 온기를 잃지 않도록 다짐해본다.

오랜만의 외출에 잃은 것도 있지만 덕분에 사랑에 대해 한 겹 더 이해하게 되었으니,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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