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집에 가면 시간을 꼭 짬짬이 내서라도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우리 삼 형제가 초등교 시절 썼던 일기장 보기.
내 일기장을 읽는 것은 싫어한다. 그때의 글씨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내용을 보면 그때의 예민함과 불편함이 다시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도 안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고 주로 불만, 질투, 미움, 짜증, 싫증이 들어있는 감정의 쓰레기통과 같은 모습이다. 딱 봐도 학교에서 검사를 받기 위한 일기를 썼음이 느껴지고 이미 세상에 찌들어 순수함이라고는 없으며 솔직히 스스로는 안쓰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이가 기가 죽어 있고 못마땅함이 물씬 묻어나는 일기라 사실 마음이 아파서 잘 읽지를 못한다.
물론 재미도 하나도 없다.
그런데 유독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어 혼자서 소리를 꺽꺽거리면서 배꼽 잡고 웃고 또 마음 한쪽이 포근포근 따스해지기도 하는 일기는 동생의 것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겸손하고, 의도적으로 가 아닌 성격상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붙임성도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건을 두루 가지고 있다. 예쁘장한 외모도 한몫하는 데다 서글서글한 성격에는 막내의 티가 숨겨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오빠와 내가 자란 분위기가 아닌 조금은 유한 분위기에서 부모님과 우리 형제의 관심을 한껏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상에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동생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우리 시기와는 달리 말 그대로 살림살이가 좀 나아진 이후에 태어나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비교적 수월하게 자랐고, 나의 때와는 다르게 부모님이 공부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주지 않았다.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해서 바깥에 친구들도 많았고, 인기가 워낙 많아서 의도치 않게 학교를 들썩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동생은 모든 면에서 나와 정반대이다.
오빠와 자주 하는 말이 동생은 "우리 집의 유일한 인싸다."라는 것이다.
정말인지 인간관계도 잘해놓았고 유행도 잘 따르고 민감한, 말 그대로 '요즘 청년'인 것이다.
사람 사귀는데에 있어서 엄청나게 수고와 노력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타고난 성격이 사람들을 떠나지 않게 잘 붙잡아 두며 특히 어딜 가나 사람들의 기억에 잘 남게 되는 그만의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오빠가 동생에게 너 정도면 카카오톡 생일인 친구가 매일매일 뜰 거 같다고 말할 정도로 인맥이 차고 넘친다. 게다가 이런 아이라면 인기에 취해 뭐든 설렁설렁할 법도 한데 주어진 일에 항상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모습 때문에 사람을 더 끌어내는 것 같고,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며 나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돌이켜보면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좋았던 것 같긴 한데, 태생이 삐뚤어진 나는 싫기도 했었던지 동생이 갓난아기 때 잠을 잘 때면 엄마 몰래 방으로 들어가서 볼과 팔을 세게 꼬집어 보기도 했고, 동생이 유치원생일 때는 놀이터에서 같이 놀다가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일부러 밀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동생이 땅으로 머리를 박고 고꾸라 져버렸는데 그 정도로 심하게 내동댕이 쳐진 애가 조금 후에 더듬더듬 일어나더니 나를 멍하게 쳐다볼 때는 잠시 뒤에 아파서 정말로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시간을 조금 지체했는데 그때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하고 두려움에 떨다가 모르고 밀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금세 괜찮다면서 눈물을 거두고 나에게 다시 뛰어놀자고 했던 동생이 고마웠던 건지 죄책감 때문이었던 지 그 애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는 것을 멈추었던 것 같다.
동생이 가장 부러운 것이 있다.
그는 아이일 때 정말 아이다웠고, 청소년기에는 정말 청소년 다웠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정말 대학생다웠다.
아이가 일찍 철들어 너무 어른이지도 않고, 어른이 철이 못 들어 아이답지도 않게 말 그대로 그때그때에 적합한 최상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아이가 심리적으로, 가정 안에서 또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고 아이 다울 수 있도록 마음이 안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 운이 좋아야 하며, 타고난 기질도 유순해야 하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확률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생은 길고,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르는 도박판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나 해당되는 않는 게임에 당첨이 된 동생이 다행이라고 생각되며 그렇게 때에 맞는'~답게' 살 수 있었던 그가 대견하다.
나는 동생이 9~10살의 아이였을 때의 맑고 티없는 모습이 보기 좋고 또 마음이 예뻐서 기특하며 그 나이에만 가질 수 있었던 '순수할 자격'을 잘 지켜내주었던 것이 고마워서 일기장을 훔쳐보며 마음을 정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보물 같은 일기장을 꺼내보기를 소망한다.
내가 그래보지 못해서 이 일기장이 신기하다고 느껴질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동생과 같은 삶을 당연히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궁금하다. 세상에는 아이였을 때 아이다웠던 사람들이 더 많을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