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된 사람
슬럼프에 빠져 아주 무기력하게 지내는 시기에 맞닥트렸다. 그림을 안 그린 지도 몇 달이 넘어갔다. 그림도 그리기 싫고 산책도 재미없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도 모두 부질없었다. 수없이 쳐다봐도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 하늘도 지겹고 달이 어디 있나 찾아도 보지 않은지 며칠이 되는지 모른다. 숨 쉬고 눈 뜨고 있는 게 무슨 의미 인가 싶었다. 자연도 사람도 지겹다. 나는 일어나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커피를 준비하는 것마저도 귀찮고 버거웠다. 아무것도 입에 대기도 싫고 움직이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내 눈 앞에 비치는 창문으로 뭔가 스쳤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어떤 색깔이 번쩍 날아올랐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새가 찾아왔다.
참새만큼 작은데 자세히 보니 오밀조밀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 차 있는 예쁜 새가 무려 7층 아파트 위로 날아올라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화단에 앉는 것이다. 나는 순간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손으로 틀어막고서 코와 입의 숨까지도 참아냈다. 내가 조인 숨통을 여는 순간 그는 도망가 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와아. 파랑새다. 신기하다. 이렇게 작고 예쁜 새가 있다니!’
예쁘고 신비로운 것들을 늘 찾아다녔다. 시간을 쏟고 돈을 들여서 예쁜 것들을 보려고 발버둥 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쁜 건 오래 보고 싶고, 몸에 두르고 싶고, 지니고 싶고, 만지고 싶다. 기분전환을 위해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예쁨을 찾으려면 마음먹고 집 밖을 나가야 볼 수 있었다. 자연 창조물이든 누가 만들어 놓은 인조이든 일상이 반복되는 집 안에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들이 직접 눈 앞까지 나를 찾아와 준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작은 생명체를 보니 새삼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왜냐면 내가 살아있지 않았으면 볼 수 조차 없었던 모습이니까.
‘살아줘서 고마워’
파랑새가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겠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비밀스럽게 티도 안 나게 살아 낸 것 같아서 대견하고 고마웠다. 태어나서 처음 본 정말 신기한 새였다. 새파란 몸에 파란 모자를 썼다. 배는 노랗고 얼굴은 하얗고 눈 주변은 검고 날개는 파랑과 노랑이 섞인 초록빛을 띠는 작은 새라니. 그런데 그를 보는 느낌은 내 손안에 엄청나게 작은 유리 인형이 쥐어진 듯했다. 손바닥을 오므리면 깨지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면 녹아버리는. 내가 어떻게 의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나는 바라만 봐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굉장히 독특한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와줘서 나는 두려웠다. 내 인기척이 전달되면 파랑새는 날아 가버릴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내가 가질 수 없는 곧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슬퍼지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마음이 들켰는지 눈 앞의 파랑새는 어느 방향으로 간 줄도 모르게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도 찾지 못하게 증발하듯 사라졌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파랑새가 찾아와 준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그림으로 남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시 그릴 용기가 찾아왔다. 나는 파랑새를 본 순간이 행복의 절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아와 준 그 날은 여느 때와 별 다르지 않던 날을 완전히 색 다르게 바꿔주었다. 그동안 행복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아주 큰 일을 기대해왔던 것이 문제였나. 1분도 채 안됐던 이 상황이 나의 모든 생각을 바꿔버렸다. 내겐 지금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이었다. 고된 노력으로 어떤 목표를 이뤘을 때 또는 오랫동안 갖고 싶은 마침내 얻었을 때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설렘, 벅참, 환희 동시에 먹먹함이 느껴지는 오묘한 박탈감도 느껴졌다. 뭔가로 쿵 하고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살면서 행복이 직접 찾아와 준 경우는 없었다.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내가 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홀로 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파랑새가 더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동화 파랑새를 찾아서가 생각났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어느 날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의 아픈 딸의 병이 낫게 하기 위해 파랑새를 찾아 먼 곳을 한참 동안 여행한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끝에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그토록 찾던 새는 바로 자신의 집 새장에 있었다. 실은 먼 곳에 있지 않았잖아.
문득 나는 이 삶에 초대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하필이면 내가. 이 곳에 초대가 되었다라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는다는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무겁게 장을 보고 불쾌감이 없도록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할 것이다. 아침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맛있게 할 것이며 집에 있는 제일 예쁜 접시를 꺼내서 요리사보다 더 멋지고 정성스레 가지런히 음식을 담아내고 가장 아끼던 좋은 술을 꺼낼 것이며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띵동 하고 벨을 누르면 싱글벙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을 것이다. 초대받은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떻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조심스럽게 주방, 거실 , 화장실 등 그 집 곳곳을 이용하며 차려진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고 칭찬을 입이 마르게 하고서는 웃음을 만개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오지 않는가. 남의 집에 초대되어서는 어지럽히고 성을 내고 민폐를 끼치고 기분이 나빠 있는 건 경우에 어긋나잖아.
나는 이 인생에 초대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나를 아주 좋아해서, 대접하고 정말 맛있는 것들을 맛보게 하려고 이 집에 부른 걸 꺼야. 다시 말해 나는 초대받은 아주 특별한 손님이며, 나를 이곳에 초대하려고 온갖 정성을 쏟은 집의 주인을 위해서라도 또 그 시간을 즐겨야 하는 나로서도 그 안에서 최대한 열심히 살다가 이 파티가 끝나거든 그땐 조용히 돌아가는 게 맞잖아.
나는 여기 왜, 뭐하러 오게 돼서 지치고 힘이 들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으로 꽤 많은 시간들 속에 불행했다. 어쩌다 그게 내가 되었을까.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나는 선택된 걸까. 그런데 파랑새를 보니 나는 단지 선택받은 것 이상으로 어쩌면 여기 초대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초대받은 이 집에 온 이상 힘없이 축 쳐져 있을 일이 아니었다. 힘을 내서 최대한 이 땅에 온 이상 세상에 맛있는 것들을 보고, 먹고, 느낄 수 있는 보답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게, 그게 예의구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초대받은 것이라고 믿는 삶에는 놀라움이 참 많았다.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에 깜짝 이벤트도 끼워져 있고 정말 감동이자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내 삶의 가장 특별한 사건이야말로 그림을 만난 일이었다. 불을 다 끄고 정각의 시간이 되자 눈을 딱 뜨니 불 켜진 케이크와 선물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그림이 내게 왔고 나는 그와 만났다. 암흑에서 빛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파랑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감은 눈을 뜨자 그가 앞에 있었다.
물론 살다 보면 가끔 맛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나를 그토록 좋아해 나를 굳이 초대까지 한 집주인의 실수였다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잖아. 모두가 항상 완벽한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갖가지 이유로 어쩔 때는 음식이 타기도 하고, 계량을 잘못하기도, 덜 익을 수도 있고 조리 시간을 못 맞춰 고기가 질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그 시간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은 아니잖아. 이야기를 하고 좋은 술을 마시고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 그런 실수는 얼마든지 웃으며 넘어갈 수 있거든.
나 어쩌면 잘해보고 싶은 말도 안 되게 두근거리는 용기가 생겼다. 내가 살아야만 더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하고 만날 수 있잖아. 빈 껍데기로 살아있고 싶지 않아. 알맹이가 쏙 들어있는 열매이고 싶어.
그 작은 새에게서 엄청나게 큰 것을 얻어버렸다.
예전엔 산다는 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알겠다. 사람은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살아볼 수 있는 것은 기회이며 행운이다.
모두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
그림을 그리고부터 변화했다.
-2017.09
내 삶도 딱 두 개로 나누어진다.
탄생을 했고, 이제야 진정으로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