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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숨 Feb 14. 2020

그만 가고 싶은 모임을
그냥 그만두는 법 배우기

영어 학원 스터디 그만두는 법

  모든 영어 회화 학원들이 이렇게 진행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의 OPIC 대비반(“Sandy의 2주 집중 수업+2주 강화 훈련반”)에서는 수업이 끝난 뒤에 꼭 그룹별로 스피킹 스터디를 하게 한다. ‘스터디’란 학원에서 대충 대여섯 명의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어 조별 학습을 시키는 것에 불과한데도, 조별 학습이 아니라 ‘스터디’라고 부르니까 괜히 자율적이고 열정적인 성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독립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정서적 부담 때문일까? 내가 속해 있는 스터디 그룹은 개설 1주 만에 인원이 일곱 명에서 네 명으로 줄었고, 나도 슬슬 그 모임에서 빠지고 싶었다.


  문제는 그런 느슨한 관계조차도 막상 그걸 그만두려고 하는 순간에는 굉장히 소중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선 이런 반문들이 생긴다. 이 ‘스터디’라는 것을 일주일밖에 해보지 않았으면서 지금 그만둔다는 건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 지난번 모임 때 비로소 서로 재미있는 농담을 하지 않았던가? 과연 이 모임이 내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게 맞을까? 아직 내가 최악으로 공부를 안 하는 내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하는 건 아닐까? 사실 내 인생에 아주 조금이라도 이 사람들이 도움이 되고 있던 거라면? 혹시 이 모임을 탈출하고 싶은 건 단순히 내 사회성 부족으로 인한 도피 성향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 불완전한 감정을 믿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선 안 되는 것 아닐까?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이 눈에 익기 시작한 아이보리 목도리를 맨 사람과 투명한 PVC 필통의 주인이 내 결정에 상처를 받는다면...


  이 반문들을 물리치는 건 SNS 계정을 삭제하는 것만큼 지난하다. ‘정말 이 계정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보단 비활성화를 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6개월이 지난 뒤에 이 계정과 관련된 단 한 사람이라도 또는 단 한 번의 포스팅이라도 그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음, 이런 질문들은 사람을 신중하게 만든다. 물론 신중하다는 건 좋은 성격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꼼꼼하게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낭떠러지 위에서 얇고 부실한 다리를 건널 때에는 신중하게 걷는 게 좋을지 몰라도, 길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넓고 평탄한 길을 신중하게 걸을 필요는 없다. 


  신중한 성격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은 자꾸 모든 길들을 얇고 부실한 다리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머릿속 경고 장치가 고장이 나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모든 걸 피하게 된다. 위험을 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도피에 불과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내가 사용하는 방법론은 어떤 결정에 앞서 너무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면, 이 질문들이 전제하고 있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추리는 것이다. 예컨대, 두 번째 문단에 제시된 7가지의 질문들에서 내 감정에 대한 정보와 판단의 근거만을 추출하고 버리는 작업을 한다. 저 7가지의 질문들의 가장 큰 전제는 ‘내가 이 스터디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고, 가장 확실한 사실은 ‘내가 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남겨질 PVC 필통의 주인이 상처 받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면, 필통 주인에게 스터디에 더 참여하기 힘든 이유를 잘 설명하고 스터디를 그만두어야만 수업 시간 때 이런 관계에 대한 복잡한 고민과 신중함에 대한 성찰을 그만두고 수업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을 ‘그냥 그만두는 법’이라고 표현한 건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다섯 문단 전으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이대로 발행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에게만 하는 이야기지만 선택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을 때도 많다. 답답한 스터디에서 빠져나와서 내가 하기 시작한 게 영어 공부가 아니라 영어 스터디를 그만두는 법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점부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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