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법
시각장애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감성적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많은 부분을 기억에 의존해야 하거든요. 촉감에 관련된 기억이 특히 많은데, 굳이 특정한 기억이 담긴 물건이 아니더라도 종종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 예를 들어, 가끔 낡은 헤드폰이나 오래된 테이프 레코더를 만질 때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라요.
사실 이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제가 16살 때 아주 친했던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삼촌의 물건을 몇 가지 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 삼촌이 쓰시던 물건과 비슷한 물건을 만지게 되면 그립고 슬픈 느낌이 아주 강렬하게 떠오를 때가 있어요. 아마 제가 삼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비슷한 촉감에 특히 더 예민하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요. - Luis
계절에 따라 도시마다 느껴지는 냄새가 달라요.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닮은 냄새를 맡게 되면 문득 여행을 갔던 장소를 떠올리게 되는데 놀랍게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 Janet
저에게는 후각이 제일 강렬해요. 숲 속을 걷거나 바다를 보며 걸을 때 나는 냄새를 좋아해요. 풀밭을 지나오는 바람 냄새도 좋아하고요. 이런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나무에서 나는 다양한 소리에도 감사하게 돼요. 단지 나무에 바람이 스칠 뿐인데 미묘하게 소리가 달라서 그 나무가 활엽수인지 침엽수 인지도 알 수 있거든요. - Rob
가장 좋아하는 장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조타석(Cockpit)이에요. 햇살 좋은 날이면 친구와 바다로 나가곤 하는데, 제가 음식을 하는 동안 친구가 배를 조종하거나, 제가 키를 잡으면 친구가 음식을 하러 가요. 아니면 배를 잠시 세워두고 이것저것 수다를 떨죠. 가끔은 배 아래의 선실이 더 기억에 남기도 해요. 비가 오는 날이면 피자를 한판 시켜놓고 실없는 농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우리의 다음 항해를 상상해보기도 하니까요. - Luis
제 침대의 바로 옆에는 전 안내견 Milo의 침대가 있었어요. Milo는 첫 안내견이어서 그런지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요.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죠. Milo가 침대 옆에서 잠을 자면서 코도 많이 골았어요. 여전히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공간이에요. - Meg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어요. 여기서 처음 베이킹을 배우기도 했죠. 첫 작품은 아주 멋지게 망했지만요. 쿠키를 구웠는데, 달달한 돌이 나왔어요 (웃음). 아무튼.. 부엌은 저에게 참 뜻깊은 곳이네요. 아주 많은 아침을 맞이했으니까요. 아일랜드에서 등교하기 전에 허겁지겁 아침을 먹던 날도, 여유롭게 아침을 보내던 날도 전부 기억이 나요. ... 어떤 장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그 장소가 더욱 특별해지는 것 같아요. - Jessie
아내와 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좋아했어요. 우리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성, 교회 그리고 성당을 들렀는지 몰라요.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건 많은걸 필요로 하지 않아요. 단지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거면 충분해요.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주.. 그리운 느낌이 들죠. - Rob
기념품을 하나씩 모으면서 결국 느끼는 것은, 결국 나에게 허락된 공간만큼만 채울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였어요. 저는 아주아주 큰 공간에 모든 기억을 전부 담아두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기억은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부분은 제 머릿속에 또는 마음속에 남아있죠.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을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꼭 필요해요. 기억이 담긴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 기억을 살아있게 하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저에겐 훨씬 소중해요. 제 기억들은 물건이 아닌 이야기 안에 보관하고 싶어요. 언제, 어떤 상황이든 바로바로 꺼내볼 수 있게요. - Rob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아예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기억하고 외우는 것에 아주 익숙해요. 기억의 길을 하나씩 찬찬히 더듬어 따라가다 보면 수천 개의 기억을 찾아낼 수 있어요. 하지만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잊어버린다는 것을 두려워하더라고요. 석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는 오렌지색이 뭐였는지 하는 것들이요.
저는 이런 것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석양이나 색깔에 대해서 떠올릴 때면 다른 사람이 제게 들려준 최고의 묘사(best description)를 떠올려요. 한 번은 친한 친구와 함께 바다로 항해를 갔는데, 그때 그 친구가 제게 무척이나 벅찬 목소리로 밤하늘에 별이 떠있는 모습을 설명해준 적이 있었어요. "Luis, 마치 까만 도화지에서 수천 개의 별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
저는 그 친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봐요. 친구의 눈으로 보고, 친구의 입을 통해 들었던 묘사가 바로 제가 밤하늘의 별을, 그리고 석양을 기억하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그게 제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에요.
소리를 듣고, 맛을 보고, 냄새를 맡고, 손 끝으로 만지는 방법 외에, 시각적인 것을 마주할 때면 저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을 빌려요. 저는 제가 많은 것을 겪고, 경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그림을 보듯 설명해주는 게 저에게는 아주아주 소중해요. 어디에 적어두거나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제가 아끼고 좋아하는 그림 같은 묘사가 저절로 마음속에 떠오르니까요. - Luis
저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느라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요. 아내와 함께 집 앞 해안가로 산책을 나갈 때면, 저 멀리 해가 수평선을 넘어가면서 만드는 아름다운 노을이 보여요. 하지만 더 이상 석양을 볼 수 없는 것에 절대 애통한 마음이 들지는 않더라고요. 옆에 있는 저의 아내, 또는 다른 사람이 그 광경을 보면서, 보이는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해요. 색깔은 어떤지, 구름이나 빛이 퍼지는 모양은 어떤지. 저는 단지 그 순간을, 그 광경을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에 집중해요. 절대로 "당신들이 보는 그것을 저도 볼 수 없어서 참 안타깝네요."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아요.
그저 이 세상이 지금 저에게 보여주는 그대로의 모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 Rob
근처의 아주 멋진 섬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였어요. 그 섬에 있는 나무들은 정말로 거대했어요. 이 느낌을 Frank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에 제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손으로 나무를 표현해보는 거였어요. "Frank, 손가락을 서로 겹쳐서 이렇게 만들어봐요!" 그 모양이 바로 거대한 나무들이 한데 섞여 서로 가지가 맞닿아 있는 모습과 비슷했었거든요. - Susan (Frank의 아내)
저에게는 그 순간에 있는 것 자체가, 그리고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굳이 사진을 찍는다거나 소리를 녹음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남는 기억은 받아들이고, 스쳐가는 기억은 그렇게 흘려보내요. 제가 평소에 꼼꼼하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좀 더 긴장을 풀고, "흘러가게 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let it go, let it be)" 하고 되뇌이죠. - Rob
저도 굳이 기억이나 경험을 적어두거나 기록하는 편은 아니에요. 한편으로는 제가 과거에 크게 얽매이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굳이 떠올리자면, 경험이나 사건보다는 사람의 목소리에 더 집중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는 꼭 녹음을 해둬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정말 이런 거에 매달리는 게 맞는 걸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저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에요. 어딘가에 저장되어있더라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게 되잖아요? - Jess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