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회상에 관련된 소유물
이번 글에서는 각 참가자들과 진행한 9번의 인터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리하였다.
2. 과거 회상에 관련된 소유물
2-1. 기억을 상징하는 물리적인 기념품
2-2. 디지털 문서 및 디지털화된 기록물
2-3. 두 가지 종류의 음성 녹음
2-4. 시각적인 소유물과 소셜 미디어
2-5. 소유물 위주의 과거 회상에서의 갈등
이번 글의 테마는 소유물(possession)이다. (1) 기념품, (2) 디지털 문서, (3) 음성 녹음, (4) 사진/비디오 및 소셜 미디어로 구성된 네 가지 종류의 소유물과, 이러한 소유물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에서 떠오르는 갈등 및 마찰을 정리했다.
모든 참가자들은 과거의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중한 물건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보관하는 장소도 매우 다양했다.
의미 있는 기억을 상징하는 기념품(memento)은 모든 참가자의 생활 반경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었다. 직접 만질 수 있는 모양과 물리적인 존재감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기념품 하나하나마다 친구, 가족, 방문했던 장소 또는 이벤트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Ray는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피규어를 만지고 느낄 때면 어린 시절 동생들과 함께 놀았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Ray의 어린 시절, 즉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기 전의 기억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형태로 남기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Ray에게 피규어를 모으는 것은 곧 추억여행을 하는 것과 같았다.
저는 기념품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요. "아 이 경험은 정말 기억에 오래 남기고 싶다"란 느낌을 받을 때면 독특한 기념품을 사서 보관하거나, 직접 찰흙을 빚어서 저만의 피규어를 만들어요. 여기 테이블 위에 피규어 두 개가 뭔지 궁금했죠?
아주 오래된 컬렉션이에요. 1996년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이 피규어를 사주시던 날을 똑똑히 기억해요. 제 방에는 이런 피규어가 500개가 넘게 있어요. 거의 모든 피규어의 모양과 촉감을 떠올릴 수 있어요. 모든 피규어가 전부 특별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하나씩은 관련된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이런 최신 기술이 하나도 없었잖아요? (그 당시의 기억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게 제가 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았던 오래된 피규어나 장난감을 사서 모으는 이유예요.
종종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요. "왜 항상 오래된 장난감만 사? 새 거를 사는 게 좋지 않아?" 왜냐하면 어렸을 때는 갖고 싶어 했던 피규어를 많이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동생, 누나 그리고 부모님에 관련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려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피규어를 사서 모으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가끔 오래된 피규어를 사러 나갈 때면,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memory hunt) 나가는 기분이에요. - Ray
Ray가 피규어를 모으듯이, Carol은 부드러운 동물 인형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여행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Carol에게 인형을 선물해주었고, 이렇게 하나씩 모이던 동물 인형이 꽤나 많이 쌓여서 침실과 거실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동물 인형 외에, Carol이 보관하고 있던 의미 있는 소장품은 바로 점자로 된 레시피였다. Carol은 누가 어떤 레시피를 주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종종 레시피를 보면서 직접 요리를 해서 먹으며 떠오르는 사람을 추억한다고 했다.
여기 이 봉투 안에는 점자로 된 레시피가 잔뜩 있어요. 제가 직접 점자 타자기로 쳐서 프린트를 해놓은 거예요. 저희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 레시피도 있고요. 어떤 레시피는 너무 오래돼서 구겨지고 찢어지는 바람에 다시 점자로 프린트를 해야 했어요. 종종 이 레시피를 보고 요리를 해요. 어디 보자.. 레몬 케이크(lemon squares). 밀가루 3/4컵.. 그리고 다른 재료 이것저것.. 그리고 여기 아래쪽 점자는 만드는 방법을 적어둔 거예요. 이 레몬 케이크 레시피는 저희 언니가 준거예요. 몇 년에 걸쳐서 사람들이 알려준 레시피가 전부 여기에 모여있죠. - Carol
Ray의 피규어나 Carol의 동물 인형처럼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전시되어 있는 기념품이 있는가 하면, 드러내지 않고 개인적인 장소에 보관하며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만 공유하는 기념품도 있었다.
Luis는 배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장소에 대해 말해주었다.
선실에 해도대* 를 들면 안에 작은 공간이 있어요. 저와 제 친구는 그 안에 저희만의 조그만 보물을 넣어서 보관해요. 어떻게 보면 잡동사니지만요. 오래된 라디오도 있고, 그 친구와 함께 항해를 배우면서 처음 바다로 나갔을 때 썼던 지도도 그 안에 있어요. 지금은 아마 너무 낡아서 틀린 정보가 많겠지만, 저희 둘 다 그 지도는 꼭 간직하고 싶었어요. - Luis
* 해도대(海圖臺): 항해용 지도 및 필요한 도구들을 놓는 테이블
모양과 질감처럼 직접 만져서 느낄 수 있는 특성과,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물리적인 존재감은 과거의 특정한 기억, 사람 또는 경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는 연도별로 파일을 정리해놓는 편이에요. 일에 관련한 이메일도 연도별로, 그리고 사적인 이메일이나 개인적인 음성 녹음도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어요. 연도별 폴더 안에는 세부적으로 폴더를 만들어서 파일을 정리해요. 세부적인 폴더의 이름은 대체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듯 정해요. "버치 베이 캠핑 2019" 또는 "Luis와 David의 밴쿠버로 돌아오는 항해", 이런 식으로요. - Luis
개인적인 전자기기에 저장된 디지털 문서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여간다. 시시콜콜한 메모부터 시작해서 친구와 주고받았던 안부 이메일 또는 공적인 문서들. 뚜렷한 목적을 가진 기록이 있는가 하면,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시시한 내용도 있었지만, 모든 기록이 한데 모여 일상의 의미를 재탄생시킨다.
Meg는 가족과, 그리고 친구와 주고받은 대화목록을 한 번도 지우지 않는다고 했다. 굳이 다시 읽지는 않더라도, 대화가 지워지면 일상의 기억이 날아가버리는 느낌이라서. Carol도 일상이 묻어있는 오래된 파일을 대체로 지우지 않고 가지고 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몇몇 참가자는 손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를 즐기지 못하는 점을 조금 아쉬워했다. Ray와 Luis는 한 때 컴퓨터로 적었던 일기를 언급하면서, 시각장애인으로서 일기를 적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Meg도 어린 시절부터 작은 일기장에 일상을 적는 습관을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는 점자와는 다르게, 펜으로 글을 "쓰고", 시간이 지나 그것을 "읽는" 행위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꽤나 사적인 일을 기록하는 일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부분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아날로그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기록물은 대부분의 참가자가 선호하고, 소망하는 형태였다. 프린트된 문서나 점자 문서가 컴퓨터로 옮겨지면, 스크린 리더 등 보조 기술을 이용한 접근성도 좋아지고, (파일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종이의 형태보다는 훨씬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또한,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기에 보관하는 문서의 양에 대한 제한이 없다.
할머니께서 직접 쓰신 편지를 컴퓨터로 옮겨 적은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요. 1900년대 초반에 결혼을 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쓰신 편지일 거예요. 할아버지께서는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에 영국군으로 참전 중이셨기 때문에 할머니도 남아프리카에 함께 계셨고, 그곳에서 보내신 편지예요.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 Janet
* 보어 전쟁 (Boer War): 아프리카에서 종단 정책을 추진하던 영국 제국과 당시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해 살던 네덜란드계 농민 출신 정착민(보어족)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Carl은 디지털 문서로 옮기는 작업이 꽤나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대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작업이 불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아주 소수의 참가자가 디지털화된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디지털화된 문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간직되는 소장품이었다.
음성 녹음은 모든 참가자들이 가장 익숙하고 아끼는 종류의 소유물이었다. 다양한 소리를 습관적으로 녹음하는 참가자도 있었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기록하듯 남겨두는 경우도 있었다.
Ray는 디지털 기기 (특히 스마트폰)의 음성 녹음 기능이 시각장애인으로서 "기억을 살아있게 하는 소중함"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음성 녹음은 마치 비시각장애인들의 사진과 같아요. 녹음이 재생될 때마다 기억을 상기시켜주니까요." - Luis
소리를 녹음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기록하는 습관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녹음기가 보편화되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왔다. Ray는 어렸을 적 카세트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녹음해서 듣곤 하였으며, Carol은 일상에서의 특정한 소리, 여행, 파티 등 특별한 일이 녹음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Carol은 지금도 종종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듣고는 한다. Janet도 45년 전의 결혼식을 녹음해둔 테이프를 들으며 회상한다며 공감하였다.
이와 같은 대화를 종합해본 결과, 녹음 파일은 크게 주변의 소리를 녹음한 " 주변의 소리(ambient sound)"와 어떠한 대상을 특정하는 "집중된 소리(focused sound)"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눠졌다.
"주변의 소리"는 특정한 기억 또는 경험의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내었다.
"지난여름 보트 트립을 갔을 때 녹음기를 꺼내서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물어보면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해요. 사진을 찍는 것처럼요. 녹음을 몇 번이고 재생하면서 듣는 일은 마치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 내가 거기 있었어'하고 느끼는 것과 비슷해요." - Frank
"여행을 갈 때마다 주변의 소리를 자주 녹음해요. 아들과 템즈 강으로 크루즈를 타러 갔을 때의 녹음이 있는데, 잘 들어보면 가이드가 이곳저곳 설명해주는 소리나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라던지, 저희가 들떠서 대화하는 소리도 전부 들려요. 남편과 둘이서 Gull Island에 갔을 때의 녹음도 있어요. 가이드의 목소리 너머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죠?" - Janet
당시의 소리가 재생되는 순간은 과거의 장면을 한꺼번에 느끼듯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반면, "집중된 소리"는 특별한 관계를 기념하고 추억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다.
"전 안내견 Milo가 코 고는 소리를 몰래 녹음해둔 게 있어요. 그리울 때마다 종종 들어요. 음성 녹음은 마치 사진과 같아요." - Meg
"남동생이 2012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얼마 되지 않아서 조카가 올린 유튜브 영상에 남동생의 목소리가 우연히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죠. 그 순간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동생과 관련된 추억을 훨씬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 Janet
참가자들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디지털 음성 녹음을 꽤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여러 가지 애플리케이션, 컴퓨터의 구석진 폴더, 클라우드 저장장치 또는 CD나 외장 메모리 등, 대부분의 음성 파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한 곳에 모여있다 하더라도, 규칙성을 가지고 정리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i) 직접 이름을 짓는 규칙을 만들어야 했고, (ii) 꾸준히 정리하지 않는 파일이 하나둘씩 쌓일수록 일일이 들으며 확인하기 어려워졌으며, (iii) 이름을 붙이는 규칙을 헷갈리거나 잊어버리면 파일을 전부 수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주 소중한 형태의 소유물이었지만 손쉽게 정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어렵게 습관을 들이지 않고 차라리 현재를 즐기는 방법을 택한 참가자도 있었다. (1-5. 형태가 없는 느낌을 통한 회상 참조)
사진과 비디오는 매우 시각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이 즐기고 아꼈다. 모든 참가자의 개인 스마트폰에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애착이 가는 비디오 또는 사진이 있었다. 시각적인 형태의 소유물은 소프트웨어 및 보조기기를 사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었다. 단편적인 예로, 음성 녹음을 분석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 한 장의 사진을 분석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더 많고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다른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사진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사진이 마치 기념품처럼 기억을 상징하는 역할이었다.
"태국을 갔을 때, 코끼리를 타고 강을 마구 거슬러 가는 하이킹을 체험해본 적이 있어요. 마지막에 가이드가 기념으로 사진을 하나 사겠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좋아하겠다.'하고 사진을 구매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사진 자체는 저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어요. 하지만 친구들은 '우와, 네가 코끼리를 타고 있어!'라며 호들갑을 떨었죠. 사실 사진보다는 그 사진이 담겨있던 액자가 저에게는 더 의미가 컸어요. 액자는 근처 마을 주민이 손수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액자의 가장자리가 특이한 촉감의 천과 구슬로 빼곡히 장식되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진이 기념품이고 액자가 부상(副賞)이겠지만, 저에게는 사진이 부상이고 액자가 소중한 기념품이에요." - Luis
디지털 형태의 사진에서는 시간/날짜 정보, 위치 데이터, 태그 된 사람들, 주조색(dominant color), 사진에 포착된 물체의 종류 등 사진 한 장에서 다양한 정보를 추려낼 수 있다. Luis는 이런 디지털 사진의 특성이 사진에 담긴 기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 저에게 사진이란 그저 '지루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이전까지는 사진 앨범이라고는 단 한 개도 없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가끔씩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저장해두는 폴더가 있어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이 언제 찍혔는지, 누구와 찍혔는지, 장소는 어디인지 하는 세부적인 정보를 알 수 있거든요. 아이폰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기능이지만, 종종 사진을 뒤적거릴 때 이런 정보를 참고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어요." - Luis
또한, 비디오는 시각적, 청각적인 구성이 적절하게 섞여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길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소유물이었다.
"제 생각에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형태는 비디오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시각적인 움직임을 보고 느낄 때 소리로 그 순간을 함께 즐길 수 있으니까요. 비시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함께 어울리게 해주는 최고의 방법이에요!" - Carol
"기억을 기록하는 가장 의미 있는 방법은 스토리, 소리 또는 비디오예요. 정지해있는 형태가 아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 상태요. 저희 부모님은 결혼한 지 60년이 넘으셨어요. 언젠가 영상 제작자를 고용해서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 저희 가족의 역사를 비디오로 제작하기로 했어요. 부모님이 어떻게 자라셨고, 서로 어떻게 만나셨고 저희가 어떻게 커왔는지를요. 저를 포함한 총 네 명이 인터뷰를 했어요. 위에 세대에서 한 분, 저희 세대 두 명, 그리고 어린 조카 한 명. 인터뷰를 모두 모아놓고 보니 다양한 이야기와 오래된 기억을 여러 가지 시점으로 들을 수 있는 게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저희는 연락이 닿는 모든 사촌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저희 가족과 관련된 기록은 전부 모았어요. "우리 가족이 이러이러한 영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혹시 가족 모임이나 행사에 관련된 기록이 있으면 빌려줄 수 있을까?" VHS 테이프도 있었고, 8mm 필름, 카세트테이프, 사진 등등 다양한 가족 행사를 담은 기록이 많이 모였더라고요.
첫 번째 DVD에는 이 모든 것을 편집해서 만든 비디오가 담겼어요. 그리고 두 번째 DVD에는 수많은 음성파일과 사진이 잘 분류되어 넣어졌어요. 특히 저희 어머니는 형제들과 노래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셔서 다 같이 연습을 하고 가족 행사에서 종종 작은 공연을 하셨어요. 음색이 아주 고우셨어요. 화음도 너무나 잘 어울렸고요. 어머니가 노래하시던 음성이 담긴 DVD를 꺼내서 들을 때면.. 매번 제 손에는 휴지가 한 움큼씩 들려있네요." - Rob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SNS)가 인기를 얻음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법이 훨씬 수월해졌다. 소셜미디어는 마치 디지털 버전의 일기와도 같았다. 참가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기억을 만들고, 공유하고, 저장하고 또 추억하는 활동에 매우 익숙했다.
브라우저나 소셜미디어 애플리케이션에 사진에 직접 설명을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며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는 것도 참가자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에 큰 기여를 했다. 선택한 사진을 묘사해주는 기능이나 업로드한 사진을 분석하여 자동적으로 캡션을 달아주는 기능 또한 시각적인 기록을 담고, 공유하고, 회상하는 경험을 한층 수월하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은 시각장애인에게 마치 자유와도 같아요.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매우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어요. 그리고 일상의 기억을 녹음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기억을 살아있게 해 줘요. 주변의 비시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거의 다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들이 사진을 찍으면 저희는 음성을 녹음해요. 그들이 페이스북에 일상을 공유하는 것처럼 저희도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러자 갑자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온라인에서 소통이 가능해졌어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시각장애인의 자유, 자립 그리고 사회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물건이에요." - Ray
Meg는 사진을 설명하는 캡션을 직접 달아 페이스북에 포스팅하고, 사진에 대해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가끔 사진을 찍으면 제 SNS 계정에 어떤 사진인지 캡션을 달아서 공유해요. 그렇게 사진을 하나씩 공유하다 보니까 제 피드에는 지나간 추억들이 잔뜩 쌓여있더라고요. 캡션이 달린 사진들은 제 시각장애인 친구들에게도 공유할 수도 있고, 저 스스로에게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어두는 메모 같은 역할을 해요." - Meg
Meg와 비슷하게, Luis도 소셜미디어 계정을 일기장처럼 사용하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을 남겨두고 있었으며, Rob도 여행을 다닐 때마다 비공개 그룹을 만들어서 여행기를 작성하고 있었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5주 반 정도 유럽 투어를 다녀왔어요. 2주는 크루즈를 탔고, 3주 정도는 버스로 돌아다녔어요. 떠나기 전에, 페이스북에 아주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초대한 비밀 그룹을 만들었어요. 저와 아내가 어디쯤을 여행 중일지 한 번씩 알려주려는 목적으로요. 새로운 곳을 방문할 때마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페이스북에 체크인을 했어요. 그 장소에 대한 역사와 재미있는 사실들을 함께 올려서 그런지 다들 재미있게 읽어주더라고요. 비시각장애인인 저의 아내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날그날 찍은 사진을 그룹에 잔뜩 올렸어요. 여행은 끝났지만, 페이스북에 들어갈 때마다 당시에 올린 사진과 이야기를 읽을 때면 마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Rob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개인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참가자들은 비시각장애인인 지인들 또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과거를 회상할 때의 경험은 대부분 내적, 외적인 갈등을 동반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오랜만에 모이는 가족 모임에서 일어나는 회상은 대부분 액자나 사진 앨범 등 시각적인 기록물이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시각적인 기록물로 이루어지는 공동적인 회상(collective reminiscence)에서 참가자들은 순간순간 감정적으로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실망감과 불안감도 느꼈다.
"제 동생들이나 사촌들이 오랜만에 모여서 다 같이 앨범을 볼 때는요, 앨범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요. 저는 살짝 신경질이 나요. 저에게 어떤 사진인지 설명은 해주지만.. 제가 설명을 듣고 나면 그 설레고 놀라는 순간은 이미 지나갔거든요." - Meg
"사진 앨범은 저를 슬프게 해요.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함께 사진을 보며 즐기지만 전 그렇지 못하거든요. 사진을 보는 것은 제가 노력을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엄마와 단 둘이 앨범을 볼 때도 조금 소외감을 느껴요. 사진 그 자체를 즐길 수 없으니까요." - Jessie
"가끔 제가 저희 가족 중에 최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다른 가족들은 사진을 찍어서 서로의 모습을 남겨주고 추억할 수 있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잖아요.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 혼자서는 그게 무슨 사진인지, 누구의 사진인지 몰라요. 어쩌다가 잃어버리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제 언니가 내일 죽는다면, 언니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모아서 작은 앨범을 만들어줄 수도 없어요. 가끔은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워요." - Janet
참가자들에게 음성 녹음은 과거에 깊이 몰입하게 해 주고 풍부한 회상을 불러일으켰지만, 비시각장애인인 친구 또는 가족에게, 참가자들이 많이 언급했던 소리를 통한 회상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었기에 공감을 해 줄 수는 있었어도,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깊이만큼의 질 높은 회상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종합해보면, 시각장애인이 비시각장애인과 과거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회상하는 데에 있어서 회상의 속도(pacing)를 맞춰 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자 어려움이었다.
소리를 통한 회상을 할 때는, 녹음된 소리를 먼저 집중해서 듣고 느끼며 어떤 기억에 관련된 기록인지 인지한 후에 대화를 나누며 회상이 시작되었다. 녹음이 전부 끝나기 전에 대화를 시작해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거나 하는 바람에 녹음을 함께 듣는 과정이 어색해지면 깊은 회상을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가 어려웠다.
비슷하게, 시각적인 기록으로 회상을 하는 방법에도 비시각장애인이 설명을 해줘야 하는 딜레이가 생겨서, Meg가 언급한 것처럼, 순간을 온전히 함께 즐기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의 습관을 적절하게 아우르며 함께 과거를 회상하는 경험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이번 글에서는 참가자들이 물리적/추상적인 소유물을 통해 순간을 담고, 공유하고 추억하는 경험을 정리해보았다. 물리적인 특징과 모양 및 존재감은 기억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아날로그 및 디지털 소리와 시각적인 멀티미디어를 통한 회상도 이루어졌으며,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은 아주 소중했다. 하지만, 비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회상에서 습관의 차이 때문에 때때로 소외감을 느끼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음이자 마지막 글에서는 과거를 기억하는 경험에 대한 바람과 소망, 그리고 인터뷰를 분석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 다음 프로젝트가 나아갈 방향을 소개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pathstoliteracy.org/blog/using-task-analysis-promote-independence
http://www.benharrisboats.co.uk/ben-harris-boatbuilding/yachts/
https://theawarenesscentre.com/write-yourself/
https://relaxingdigital.com/what-are-ambient-sou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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