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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05.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삶의 끝자락에서의 진정한 행복

 “이 세상, 잘 살다 간다.”


 임종을 앞둔 어떤 할머니가 이 세상과의 끈을 놓기 직전, 편안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 얘기는 그냥 어디에선가 흘려들은 얘기였는데, 순간 무척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 얘기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있다. 도대체 그 기나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냈으면 죽음 앞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까 싶었다. 마음속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나’라는 존재가 아예 없는 그저 무 상태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가 아닐까? 여하튼 이 한마디가 남은 내 삶에 있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실 난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진 않는다. 혹여 어떤 불치병에 걸리더라도 굳이 살려고 발버둥을 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자연의 순리대로 따라가지 않을까 싶다. 글쎄, 모르겠다. 그 누군가는 아직 죽음을 눈앞에 두지 않아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내 엄마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했다. 엄마가 응급실로 실려 온 이후부터 이 세상과의 이별을 하는 그 순간까지 ‘연명치료’라는 것을 통해 남은 생명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온몸에 꽂힌 의료기기들, 그리고 고통으로 얼룩진 엄마의 숨 가쁜 신음소리……. 지금도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다 편안하게 보내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사실 내 엄마도 마지막 그 순간, 그다지 편안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 역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난 축 늘어진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엄마, 사랑해.”, “엄마, 하느님 믿지?”라고 말하면서 울먹였고, 이에 엄마는 미세한 떨림으로 반응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나눴던 엄마와의 짧은 대화는, 그 뭐랄까! 내 삶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후 내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미련 없이 살기로 했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그러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봤다.


 가장 먼저 나답게 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무엇인가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삶을 지켜나가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훗날 미련 없이 이 세상과의 이별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답게 사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내 나름대로의 멋진 인간상이 있다. 우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모습 속에 책임감, 신뢰, 배려, 겸손, 정의, 편안함,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이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을 다 충족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항상 새기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러한 멋진 인간상과 근접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책임감이란 우선 결혼에 대한 책임감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결혼이기에 한 남편의 아내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남편에게 있어서는 친구 같은 아내,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나무 같은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내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맞춰주면 편안한 가정 속에서 저절로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자칫 그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도 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면서 양보하는 능력은 개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상대방이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제삼자가 될 수도 있다. 그 떠넘기기식 책임은 절대로 사양해야 한다. 그건 곧 불행의 시작이고, 결코 내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신뢰이다. 가족은 물론 지인들과 신뢰를 쌓으려면 한번 정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게 필수다. 나 같은 경우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약속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다만,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한번 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우스갯소리로 한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경험상, 신뢰가 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냥 단순하게 얼굴 보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만남 자체가 무척 소중하고,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입이 무거워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누설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결국 부메랑이 되어 일이 더 커질 수가 있다.


 세 번째는 배려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배려심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중요한 건, 배려심이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왠지 내가 대접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무시되는 게 아니라 나 또한 겸손해지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된다. 물론 너무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배려의 감을 익힐 필요가 있다. 한 예로 어떤 지인의 지나친 배려로 인해 부담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자칫 나 자신이 교만해질 수도 있고, 그 자리가 결코 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반대로 배려심이 없는 사람과의 만남은 왠지 내가 무시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국 그 만남은 오래가지 않는다.


 네 번째는 겸손이다. 난 개인적으로 겸손한 사람한테 끌린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겸손은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왠지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고, 비밀을 지켜줄 것 같고,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에서다. 사실 잘난 체를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굉장히 피곤해지고, 에너지가 자꾸만 고갈되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의욕 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도 있듯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한 사람들이 많다.


 다섯 번째는 정의다. 사람들 가운데 유독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우리 집의 첫째 딸아이가 그렇다. 각종 SNS나 기사에 나오는 반인륜적인 행동이나 사회적 부조리 등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엄마인 나를 붙잡고 쌓인 분노를 다 토해내는 걸 보면 말이다. 사실 나도 젊었을 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피해를 보는 일도 많았고, 위험에 노출되는 일도 간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나이가 들었고, 어느 정도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옛날 정의로웠던 부분은 아직까지도 자랑스러움과 떳떳함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평생 자존감으로도 이어진다.


 여섯 번째는 편안함이다. 누군가에게 편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 누군가는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은 거라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즐거운 일보다는 힘든 일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삶은 고행이다.’라는 말이 있을까! 그런 힘든 세상 속에서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편안한 사람의 조건에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결같은 모습이다. 세월이 흘러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편안한 사람! 당신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신은 편안한 사람인지…….


 일곱 번째는 따뜻함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다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 예전, 마음이 참 따뜻했던 어떤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엄마들끼리 동그랗게 원을 그려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모임에 끼지 못한 채 서성이는 엄마가 한분 있었다. 그때 마음이 따뜻했던 그 엄마는 소외된 엄마를 조용히 데리고 와서는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그때 나를 포함한 주변 엄마들은 그런 따뜻한 엄마의 모습에 무척 감동했고, 이후로도 그 모임은 끼리끼리 보다는 누구 한 사람 소외당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훈훈한 모임으로 발전해 나갔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된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70대 할머니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예전엔 미처 몰랐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노인이 되어서 뭐가 그리도 행복하다는 것인지.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행복은 나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마음이 불행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가 지긋하고 비록 가진 게 없더라도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아마도 그 할머니는 세상을 나름 잘 살아온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7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니 그게 바로 삶의 끝자락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아무런 미련 없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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